기관 없는 신체를 관통하는 강도

                                                                                    이선영 | 미술평론가

 오지연의 작품전에는 뭔가 잔뜩 삼키고 웅크려 있는 구렁이 같은 구물구물한 것들이 여기저기에 널려있다. 그것들은 다양한 형태를 가지면서도 소재의 통일성을 통해 끊어질 듯 이어진다. 때로 그것들은 허공으로 솟구치기도 하고 벽면이나 기둥을 관통하기도 한다. 그것들은 통통하기도 하고 홀쭉하기도 하며, 짤막하기도 하고 길쭉하기도 하지만, 그 모두에는 붉은 단면들을 상처처럼 달고 있다. 만지면 피가 묻어날 듯 한 단면은 가장 민감한 부분들이 잘려나간 모습이다. 단면들을 그자체가 몸통으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하여 벽면에 새로운 뿌리를 내리기도 한다. 쫄쫄이 질감의 천들로 이루어진 피부의 수용능력은 무한대로 보인다. 더구나 그것은 계속 연결될 수 있다. 이 리좀적 형태들이 횡단하지 못할 곳은 없다. 오지연의 작품 규모가 크다고 할 수는 없지만, 형태와 규모의 가변성은 극대화되어 있다. 그것들은 끝없이 발아하고 잘려지며, 연결된다. 자신들이 지탱하고 있는 벽면과 바닥 등에 일시적으로 고정된 구조는 변형의 궤적 그자체이다. 지방 덩어리와 붉은 피를 연상시키는 형태와 색감은 유기체의 몸뚱이이자 감정의 덩어리이다. 그것들은 생물학적으로나 상징적으로 여성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이 여성은 명확한 형태나 성격을 가지지 못한다. 작가는 ‘완성된 감정이 있을 수 있을까’를 물으면서, ‘나의 감정은 완성되지 않기에 나의 작품은 변모한다. 나의 감정은 변화하기에 나의 작품은 완성되지 않는다’고 답한다.

 오지연의 작품이 단순히 어떤 감정의 묘사를 넘어서는 지점은 독특한 재료와 방법론에 있다. 작가가 선택한 것은 코팅 처리된 장갑으로, 작업실 바닥에 많이 버려져 있던 것들이다. 누더기 질감과 바랜 붉은 색은 절묘하게 조합되어 몸이나 감정의 상태를 표현하게 된다. 오지연은 조각을 전공했으나 처음부터 부드러운 재료에 관심이 많아서 이태리 타올, 쌀포대, 실리콘 등을 사용해왔다. 이번 전시에 사용한 코팅 목장갑은 부드러운 재료라는 연속성을 가진다. 코팅 목장갑은 노가다 작업 때 많이 착용하는 것으로, 수백 개의 장갑이 분해되어 활용된 이 전시장은 그자체가 부지런히 놀렸을 손의 움직임을 연상시킨다 그것들은 어떤 구상적인 형태가 아니라 질감으로 귀착되고 있기에, 노동의 양이 예술적 질로 전화하는 어떤 임계점을 통과한 고통의 흔적들이다. 장갑은 또한 그 하나하나가 세포가 되어 일종의 유기체를 형성한다. 그러나 오지연의 작품은 전체와 부분의 연관관계가 해체된 상태이기에, 유기체라기보다는 ‘기관 없는 신체’(들뢰즈와 가타리)라고 할 수 있다. 세포나 단면의 느낌을 주는 붉은 코팅 부분은 대개 장갑의 크기를 벗어나지 않기에, 무한대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이 무정형 구조는 신체적 스케일을 유지한다.

 작품의 세포나 기관이 되기 위해 잘려진 것들을 연결하는 것은 손바느질이다. 바느질은 부드러움을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이러한 연결은 심리적인 것을 포함한다. 바느질은 그자체가 깊이 감정 이입되는 과정이다. 굴곡진 형태는 기복이 많은 감정을, 급작스럽게 노출된 단면은 예민해진 감정을 표현한다. 바느질이라는 실제적, 그리고 상징적인 행위는 부드러우면서도 강력하여 벽을 통과하는 느낌으로 설치한 작품에서 보여지 듯, 벽을 뚫기도 한다. 단편들과 그것을 연결시키는 바느질은 어떤 감정이 흐르고 고이고 단절되며 다시 시작되는 과정이다. ‘감정세포’라는 전시부제는 세포처럼 자라고 분열하고 사멸하고 다시 생성되는 과정과 중첩된다. 재생, 번식, 증식이라는 유기체의 과정은 심리적인 것에도 해당된다. 그러나 오지연의 감정세포는 특정한 감정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인간의 심리상태를 표출하는 초상화 같은 것이 아니다. 몸 또는 심리적 증식과정이 썰리고 잘리는 과정과 연결되며, 무정형으로 응어리지고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증식하는 이 몸 덩어리가 유기체의 한계를 넘어서듯이, 그것들에 고여 있는 감정은 인간주의적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인간적 감정이라기보다는 원초적 감각에 가깝다.

 도마뱀의 꼬리나 실험실의 플라나리아 같은 재생능력을 가지는 그것들은 죽음과 삶의 구분을 초월한다. 몸속의 것을 밖으로 꺼내서 확장해 나간 형태는 안과 밖의 구별도 철폐한다. 유동적 덩어리들은 몸을 연상시키지만 얼마든지, 어디서부터든지 더 연결할 수 있다. 과거의 것을 재활용할 수도 있고 원래 작품을 잘라 놓을 수도 있다. 오지연의 작품은 구조를 이루는 뼈대가 없다. 제작이 훨씬 수월했을 구부러지는 철사도 사용하지 않았다. 형태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상황에 따라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에 작용하는 유일한 힘은 중력일 뿐이다. 그것들은 대개 아래로 축축 늘어지거나,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주변의 것에 밀착하여 변모를 꾀한다. 또 다른 생성은 절단과 더불어 시작된다. 자연에 순응하는 듯한 부드러움에는 멜랑콜리와 가혹함이 내재되어 있다. 드로잉도 설치도 처음과 끝이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지연의 ‘조각’은 재현적 질서에 의해 견고화된 시각성이 아니라, 원초적 촉감에 호소한다. 그것은 여성적 언어일까? 보통 여자아이들은 아버지나 남자친구들이 선물한 봉제 인형 같은 것과 함께 자라나기 마련이지만, 이 포근한 솜 덩어리에 내포된 자기 보호적 환상은 자라나면서 잘려지고 만다.

여성/작가는 작품을 통해 그것을 다시 잇는다. 그러나 그것은 봉제인형의 복구가 아닐 것이다. 오지연의 작업들은 ‘바느질을 통한 치유’ 같은, 여성작가에게 상투적으로 붙기 마련인 용어와 거리가 있다.

공장같이 거친 작업실이 아니라, 집같이 편안하고 안정적인 장소에서 만들어질 수도 있는 촉촉하고 부드러운 덩어리들은 분명 불안함을 사라지게 하는 치유의 과정에 속할지 모르지만, 그녀에게 돌아 가야할 원래의 상태란 불확실하다.

 따라서 치유가 지향하는 목적 또한 불확실하다. 주체는 복구되어야할 전체 속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수 없다. 오지연이 형상화하는 주체는 이질적인 구성요소들의 집합과 배치의 결과물이다. 펠릭스 가타리는 [기계적 무의식]에서 주체를 전체화할 수 없는 강렬한 다양성으로 간주한다. 여기에서 주체성이란 초월적 형식체계나 상징체계와는 무관하다. 원형적이지도 구조적이지도 체계적이지도 않다. 전체와 대립되는 부분, 사회와 대립되는 개인이 아닌, 이 이질적 주체성은 타자의 복합체인 개인이다. 여기에서 나는 하나의 타자이다. 즉 ‘부분적 언표 행위의 구성요소들의 교차점에 구현된 복수적 타자’(가타리)이다.

 가타리는 [카오스모제]에서 주체성은 더 이상 공기나 물처럼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어떻게 주체성을 생산하고 포획하고 풍부하게하고, 돌연변이적인 가치세계와 양립할 수 있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재발명해 가는가가 중요하다. 오지연의 작품에서 주체는 덩어리와 줄기의 배치에 의해 생산된다. 작업은 발생과 소멸이라는 은유 속에서, 주체화의 복합체들을 구성하는 것이다. 무정형적인 덩어리는 주체성에 대한 어떤 보편주의적 표상도 뭉개버리고 만다. 그것은 존재를 다르게 실존하도록 명령하며 새로운 강렬도(intensity)로 존재를 강탈한다. 어떤 행동 또는 어떤 감정의 순간에 절단된 붉은 단면들은 그 강도의 흔적들이다. 단절은 또 다른 발생으로 회귀하게 한다. 오지연의 감정세포에 선명한 것은 강도의 문제이다. 강도란 칸트에 의해 ‘순간에 인식되는 크기’로 정의된 바 있다. 가타리는 [카오스모제]에서 모든 현상은 고정되지 않고 자체적 힘에 의해 다양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내재적 리듬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리듬은 다른 것과 접속하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가는데, 이 리듬을 강렬도라고 규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