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순, 혹은 현실의 감성적 토대를 복원하는 이미지 여행자

                                                                                 김동일 | 사회학,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박영순의 작업을 나는 이렇게 요약하고 싶다. 현실의 감성적 토대를 복원하는 이미지 여행이라고 말이다. 박영순에 작업에 접근하면서, 평자가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그녀가 현실의 미학적인 변환을 수행하는 방식이다. 그녀는 분명 그녀가 살아가는 현실을 참조해 나가면서도 이를 감성적 유대와 포용, 그리고 소통의 복원이라는 미학적 과제로 풀어나가고 있다. 박영순은 분명, 현실과 현실의 모순을 다루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그녀가 다루는 현실은 녹녹하지 않음에 분명하다. 그녀는 자신의 작업 노트 곳곳에 "인간으로서 느끼는 고통에 대한 임팩트"(다시 생겨남, 2004), "인간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고달픔"(Where should I go, 2005)을 적고 있다. 이 고통과 고달픔의 근원은 사회적인 모순들이다. 이 모순들은 사회적 삶 속에서 그녀가 경험하는 '문화우월주의', '남성우월주의'(소통의 흔적)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흥미로운 점은 박영순이 그러한 사회적 모순을 작가 자신의 예술실천의 현실 속에서 체감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블랙홀처럼 모두 빨아들여 자신조차 흡수해버리는 자기파멸의 상태”인 ‘여성불평등’은 사회전반의 문제일 뿐 아니라, ‘여자 작가들의 약자로서 위치’와 관련된다.

하지만, 더 흥미로운 점은 정작 그 녹녹치 않은 현실에 맞서는 박영순의 미학적 대응이다. 그녀는 “세상은 지금도 여전히 남자를 축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처럼 힘의 불균형이 가득한 세상에서 여자 예술가들은 남자의 저편에서 팽팽한 긴장감으로 그들과 대등하게 대응해야 한다”라고 날을 세우면서도, 정작 표현의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는 한발 물러서 감성적 유대와 포용의 복원이라는 다소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박영순은 그녀의 작업이 지칭하는 사회적 폭력에 가장 극렬하게 저항하는 방식은 '한발 물러섬'이다. 이점은 평가에게 이해할 수 없거나 오히려 흥미로운 현상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에서,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현실에 대한 당연한 반응은 '분노'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약자의 분노는 풍자와 가학적 아이러니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특히, 미술은 약자들이 사용하는 손쉬운 무기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미술은 이미지를 통해 기민하면서도 강력하게 모든 의도를 표현할 수 있는 풍자의 개인 화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가능하다. 혹여 그녀의 한발 물러섬이 박영순에게 강력한 풍자보다 오히려 더욱 극렬한 사회적 저항인 것은 아닐까? 그 이유는 이 한발 물러섬이 모든 가시적 폭력에 또 다른 수단으로 맞섬으로써 충돌하는 전선만을 전면에 부각하는 대신, 더욱 더 거대한 전선의 토대와 보이지 않는 지형을 밝히고,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선을 우회하면서, 더 깊은 감성의 심연, 리얼리티를 드러낸다고 할까? 물론, 이러한 우회적 전략을 구사하기 위해 그녀는 전면에서 자신에게 관철되는 아픔을 겪어내야 할 것이다. 그녀가 사회적 약자들의 입장에서 서서 체험되는 아픔을 작가로서 체현하는 방식은 그 아픔의 맹렬함만큼이나 준엄하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조금 더 복잡해진다. 그녀의 물러섬은 소통의 회복이라는 또 다른 미학적 변환을 거치기 때문이다. 감성적 유대와 포용으로서 ‘한발 물러섬'이 소극적인 전략이라면, 그러한 감성적 유대와 포용을 소통의 문제로 전환시키는 작업은 보다 적극적인 미학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박영순이 구사하는 감성적 유대와 포용, 그리고 소통의 복원은 서로 별개의 것들이 아니라 작가로서 사회적 모순에 대처하기 위해 정교하게 고안된 미학적 수단이자 방법론이라는 사실이다. 그녀가 이미지를 무기로 치고, 찌르는 가학적 풍자를 사용하지 않고, 한발 물러서 소외받은 대상의 입장이 되어 그 아픔을 묵묵히 수용하는 이유는, 사회적 모순을 행사하는 바로 그 거대 주체들과 소통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박영순은 그녀 자신이 문제로 삼는 바로 그 모순을 유발하는 주체들과 소통하려 한다. 예컨대, 그녀는 “여성작가로서 세상, 자신 그리고 남성과 소통하고 싶”어 한다. 그녀는 첨예한 갈등의 전선 한 가운데서 만나게 될 타자-적들에게 말을 걸고 싶어 한다. 사회적 모순이자 예술장 내부에서 극복되어야 할 타자들인 ‘남성’과 ‘세상’, 그리고 때로 ‘관객’들에게 말을 걸기 위해 그녀는 바닐라 향 젖 냄새를 바른 자신의 심장을 내어 놓는다(소통의 흔적 I, 2008).

또 여성의 가장 여성적인 여성성을 ‘생리’로 보고, 이를 원형구 형상의 ‘생리덩어리’로 제시한다(우리는 아픔이 있다, 2005). 사회적 존재로서 여성과 표현의 주체로서 여성을 동일화시키고, 이를 가감없이 전달하려는 것이다.

박영순에게 적들은 공격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의 상대라 할 수 있다. 그녀가 적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 놓고 전달하려는 의미는 사회적 모순 속에서 억압당하는 약자들이 실상 사람과 사람으로서 평등한 존재라는 평범하지만 분명한 진실이다. 또한 이는 관객-타자들에게 작가로서의 존재정당성을 진정으로 이해시키려는 노력이다. 이러한 이해를 위해, 박영순은 사회적 강자 혹은 타자를 공격적인 풍자와 가학적 아이러니를 통해 윽박지르고 찌르는 대신 한발 물러서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박영순에게 한발 물러섬은, 소극적인 후퇴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 그리고 예술실천의 정당한 주체로서 자신을 인정받기 위한 미학적 대화의 적극적 방법일 수 있다.

박영순은 사회적 모순과 예술적 모순을 서로 중첩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다. 나아가 작가는 사회적 모순과 예술적 모순이 교차하는 지점에 그녀 자신을 위치시킨다.  사회적 모순을 여성의 문제는 곧 예술계에서 여성작가의 현실인 동시에 박영순 자신의 문제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