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못 박힌 메시아 강지웅의 성화

                                                                                 이재언 | 미술평론가

종교화를 기독교에서는 성화(聖畵 · ICON)라 부른다. ‘성스러운 그림’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구체적으로는 ‘성경을 기술한 그림’이라는 의미도 있다. 15세기 쿠덴베르크 인쇄술이 보급되기 전까지만 해도 성경이 귀하여 민중들이 복음을 접하기 어려웠던 바, 성화가 그 역할을 대신 했던 것이다. 서양 미술의 뿌리를 들춰 보면 희랍신화와 크리스트교 성경 테마가 구심점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근세 계몽기에도 여전히 성경은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었으며, 20세기에 접어들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점차 개성적인 표현양식이 두드러지고는 있으나 여전히 성경적 영감이 많은 거장들에게서 추구되곤 했다. 루오는 말할 것도 없으며, 샤갈의 경우 유태인임에도 불구하고 신약의 그리스도와 관련된 내용들을 창작의 모티브로 삼아 기념비적인 걸작을 남기기도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가 정착된 지도 한 세기를 훌쩍 넘겼다. 하지만 우리에게 성화는 여전히 친숙하지가 않다. 친숙하지도 않을뿐더러 이렇다 할 창작 역시 그다지 눈에 띄는 것도 없는 실정이다. 예술창작이 신앙과 융합될만한 역사와 토양이 없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서구의 찬란한 기독미술에 주눅 들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물론 신교와 구교의 교리적인 입장차에서 오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기독교가 정착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미술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성화는 서구 거장들의 것들을 답습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반 세기 전 운보 김기창이 도포 입은 개성적인 예수 일대기 성화들을 그렸던 수준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보통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서구 거장들의 작품들, 특히 워너 살만Warner Sallman이나 하인리히 호프만Heinrich Hofman의 작품들이 지금도 성화의 교과서처럼 받들어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성화작가들이 대부분 이러한 교과서적 화풍의 그림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국내 신학대학은 많아도 그와 함께 예술창작이 조화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양이 빈곤했기 때문일 것이다. 몇 년 전 서울에서 전시가 있었던 지거 쾨더Sieger Koeder의 작품세계와 같이 작가 개성적 감각과 영감에 기초한 밀도 있는 현대적 작업들이 우리로서는 상당히 아쉬운 대목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신예작가 강지웅의 등장이 참으로 반갑다. 얼마 전 수원 대안공간 <눈>에서 있었던 신예작가 강지웅의 <For the Smartfool>(2011.7.5.-14)전이 있었다. 그의 그림들은 기존의 교과서적인 성화들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는 경우, 일정한 상상적 고증과 재현을 바탕으로 성경의 서사적 사건을 극적으로 이상화된 형식으로 기술하는 것이 보통이다. 거룩함을 이상화시킨 것에 반해 강지웅 작가의 성화는 기존의 성화나 영화의 장면을 인용하거나 차용하여 표현한 풍자적이고 비판적인 문맥의 그림이다. 어딘지 모르게 블랙코미디 같은 풍자의 맥락 속에서 시제도 초시간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데서 성화로 부르기를 주저하게 한다.

작가가 자신의 화면을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주제는 ‘똑똑한 바보(smartfool)에게 던지는 의미시장하고 엄중한 질책과 호소’로 요약된다. 인류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의 고난과 탄식, 영적으로 눈이 먼 우리 시대의 숱한 헛똑똑이들이 자행하는 어리석음과 탐욕, 그리고 오만함을 꾸짖는다. 작가에게는 영적인 싸움의 비망록과도 같은 그림들이다. 초시간적 실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뭇 사람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고 있음을 선지자 요나와 같이 호소하는 것이다. 사실 성경에 나와 있듯이 그리스도를 박해한 이들은 종교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이거나 이교도들이 아니었다. 엘리트, 즉 제사장처럼 종교적, 사회적 권위와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탐욕에 사로잡혀 영적 메커니즘이 마비된 사람들의 소행이었다. 문제는 십자가 첨탑이 숲을 이루는, 그야말로 성령으로 충만해 보이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여전히 그에게 돌을 던지고 십자가를 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화면에서는 뭇 사람들의 모습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대조를 이룬다. 그리스도의 모습은 순박하고 겁까지 많은 시골뜨기 청년 같은 모습인데 비해 그를 조롱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세련되고 대범한 모습의 사람들이다. "과거엔 종교화를 통해 종교를 보았다면 현대인은 종교화를 통해 현실을 본다"는 작가의 말마따나 자신의 그림엔 현실의 문제를 반영, 질책하고 있다. 그가 반영하고자 하는 바는 믿음의 부재, 믿음의 허상이나 혹은 믿음이라는 이름의 부조리가 아닐까. 교회는 있으나 구원이 없고, 신자는 있으나 믿음이 왜곡되어 있는 오늘의 현실을 성찰해야 할 과제가 작가를 통해 천명되고 있는 것이다.

강지웅 작가의 성화는 기술의 방식이 재현에 기초하고 있지만, 작가만의 개성적인 면모라는 점은 역시 자신만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표정 외에 주된 이미지들이 차용 내지는 인용 이미지에 있다. 재현적 성화에 있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얼굴이다. 사실 어떤 유형화된 얼굴을 보여 주는 것 자체가 복음적 상상력을 제한하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기에 영화 벤허의 경우도 지극히 절제했던 대목이다. 보통 우리에게 익숙한 예수의 이미지는 워너 살만의 그림에서 보듯 형형한 눈빛의 카리스마가 넘치는 금발의 백인으로 고정돼 있다시피 하다. 그런데 작가의 화면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의 얼굴 가운데 수난상은 어디서 본 듯한 이미지이다.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 of Christ)에서의 멜 깁슨 얼굴이 연상되고 있지 않은가. 미디어를 통해 제시된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가운데 패러디(풍자적 개작) 혹은 패스티쉬(혼합모방)의 효과를 구현하고 있다는 점은 21세기 미의식을 지닌 작가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작가가 종교적 현실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은 당연히 익명의 감상자를 향해서이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그것이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도 숨길 수 없다. 작가가 자신의 작업 노트를 통해 밝혔듯이 자신의 그리기 작업이 신앙적 자아 성찰임과 동시에 피그말리온적 승화이자 자기 최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리기 과정과 주제에 작가 스스로 깊이 몰입되어 가면서 얻는 법열(法悅)이야말로 성화의 중요한 미의식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다만 경계할 것이 몰입에 의한 감정과잉의 문제이다. 비판적 메시지의 관건은 보다 압축되고 절제된 수사학적 밀도와 완성도에 있다. 작업을 향한 에너지와 의욕을 화면에서 점진적으로 숙성시킨다는 것은 그것이 종교화의 범주에서만이 아닌 보편적 회화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 첩경이다. 작가의 그림은 공간적으로 교회 안에서보다는 일반 대중을 향해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