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aller is Bigger

                                                                                 정형탁 | 컨템포러리아트저널 편집장

정재영의 이번 전시 <Self-portrait of ordinary people>은 오늘날 고독한 현대인을 표상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인스턴트로서 라면, 부지런한 처세로서 발, 삶의 목표로 추정되는 수직적 설치물(전시장엔 사정상 설치되지 못했지만)이 이러한 작가의 의중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우선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작품에 사용하는 재료이다. 발을 형상화하는 데 쓰인 라면이 대부분 유통기한이 지난 라면이라든가 지난 전시에 보여준 도베르만을 형상화한 작품이 숯이었다는 것은 그가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시야를 보여준다. 그러니까 정재영은 물질문명과 대량소비, 산업화나 분업화, 개인과 고독이라는 다분히 현재적 풍경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거 같다. 그것을 굳이 후기 자본주의라든가, 고엔트로피 사회라든가, 헐벗은 삶이라는 용어로 치환할 필요는 없을 거 같다. 이것은 오히려 인생관, 삶의 태도,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소외, 고독, 군중, 개인이라는 다분히 추상적 실재들은 30대 초반의 젊은 작가 정재영의 한계와 가능성이 공존하는 개념들이겠다.

정재영의 도베르만을 형상화한 <HAPPY>시리즈는 고등학생 때 애완견을 키웠던 경험에서 시작한다. 길지만 작가의 노트를 인용한다.

 

제가 고등학생 때 마지막으로 애완견을키웠었는데 마당에 풀어놓고 키우던 녀석이 어느 날 심하게 맞아서 불구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의 슬픔과 분노 그리고 미안함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서인지 <HAPPY>시리즈의 첫 작품 제목이 <'HAPPY'야, 미안해>입니다.

그리고 <HAPPY>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제목이 <'HAPPY'야, 너는 행복하니?>인데 저는 애완동물들을 보면 제 경험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불쌍한 마음이 먼저 듭니다. 잘해주는 주인도 있겠지만 학대하는 경우도 많이 보곤 합니다. 비록 학대는 안하더라도 과연 잘해주는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혹은 과도한 애정표현도 어떤 점에서는 학대가 아닌지 의문이 들 때도 많았습니다. ‘HAPPY’라고 이름 지은 것이 진정 누구를 위한 happy인지 묻고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에 반대하는 극단적인 동물해방론자는 아닙니다. 다만 동물에 대한 최대한의 자유과 권리를 보장해 주길 바라며 저는 그것이 동물에 대한 불쌍한 마음에서 시작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도베르만 같은 경우는 다양한 종의 교배를 통해 경찰견으로 창조되어 그 목적에 부합하게 귀와 꼬리를 자르고 무섭게 보이도록 이미지를 만듭니다. 그런데 그것이 애완동물로 길러지는 현재도 이어진다는 것이 충격적 이였습니다.

또한 <HAPPY>작업을 하면서 제가 느낀 것이 있는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귀와 꼬리가 잘리고 대신 멋있고 잘 생긴 이미지로 주인을 위해 살아가는 도베르만처럼 나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혹은 내 의지로 누군가를 위해 이미지를 만들어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간혹 주인이 애완동물에게 자신의 마음을 자신에게 얘기하듯이, 내가 나한테 미안하다고, 행복하냐고, 힘을 내라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정재영의 이런 개인적인 기억과 경험의 재현은 사각형 프레임을 통해세상을 유비시키는 재현구조를 닮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흔히 창틀로 간주되는 예술적 공간은 사실 현실과 어떤 관계도 없다. 물론 우리는 그림 혹은 조각 속에서 현실의 여러 이미지를 겹쳐 볼 수는 있지만 논리적으로 그것은 그냥 붓이나 연필, 물감덩어리거나 철, 나무인 것처럼 실제 아무 관련이 없다. 물론 이러한 문제 즉, 현실과 예술 간의 관계는 사실 전통적으로 철학의 영역이다. 세계와 그것을 어떻게 재현하는가하는 문제 말이다. 이 재현의 문제를 떨치는 게 현대미술의 특징이기도 하다.

<HAPPY>시리즈의 숯이 ‘재생, 정화’의 의미도 있을 수 있고, 나무를 태워 만들어져 ‘파괴와 죽음’의 의미로 읽을 수도 있으나 시각 장(field)에서 이러한 의미는 오히려 상상력을 가두는 게 아닌가싶다.

그것은 마치 도시 아파트를 캔버스에 그려놓고 단자화된 개인이거나 소통이 단절된 현대인이라고 읽게 만드는 것처럼 위험하고 단편적일 수 있다. 라면과 숯처럼 버려지고 잘려지는 가로수 나무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다.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서 심어놓고편의에 의해서 잘라버리는 나뭇가지들을 모아 일일이 물로 깨끗이 씻어서 사람에 의해 오염된 때를 벗기고 자연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아름다운 색을 찾아주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작은 나뭇가지들을 하나하나 철사로 엮어서 하나의 덩어리, 구를 만들었는데 완전한 형태의 구가 아니라 구멍이 뚫린 구의 형태로 파괴된 지구, 혹은 파괴된 태양의 모습을 표현하려 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술된 언어가 그의 작품을 대변해 주면 좋겠지만 앞서 말했듯실체와 이미지의 틈은 어쩌면 우주의 간극만큼이나 멀다. 전시장에 나무덩어리가 놓여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산 속의 나무나 길거리 가로수를 연상하지 않는다.(물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갤러리나 미술관에 놓인 어떤 사물은 실재 사물과는 다른, 온전히 별개의 기호로서 개별적 가치를 지닌 것이다. 또 버려진 사물들의 조합이라는 예술 형식은 피카소, 슈비터스, 토니 크랙 등 너무나도 많이 보아 온 예술 형식이 되었다. 만약 정재영이 100년 전에 태어났다면 이러한 의미가 새로운 현실과의 관계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찬사를 받았을 것이다.

 

다양한 크기의 발들은 여러 사람들의 모습일수도 있지만 저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발의 형태는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하는 동시에 그 사람들의 발자취나 제가 살아온 발자취라는 의미도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라면이라는 소재는 대중적이면서 빠르고 저렴하게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바쁘고 부지런한 현대인들의 모습을 표현하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가 중점을 뒀던 부분은 전시장 입구에 있던 작은 발처럼 외로움이나 쓸쓸함 같은 감정들을 표현하려 한 것입니다. 라면이라는 것이 여럿이서 함께 먹기도 하지만 저 같은 경우 주로 혼자서 먹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듯 라면이 가지고 있는 외로움이나 안쓰러움 같은 감정들도 표현하려 하였습니다. 저는 라면이 대중적이고 간편하고 저렴한 식사라는 의미 이외에 외로움이나 안쓰러움 같은 감정들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스턴트식품으로서 라면과 외로움, 쓸쓸함의 감정의 교차 역시 과도하다. <HAPPY>의 개에서 연민을 떠오른 것만큼 말이다. 이러한 과도한 수사학이 오히려 정재영의 작품의 시각적 맛을 감소시킨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지만 이 한계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우선 에폭시나 폴리 계열을 쓰지 않고, 전통적인 제조 방법으로 밀가루 풀을 직접 만들어 작업을 진행했다는 점이나 한계로 지적한 버려진 나뭇가지를 재생하는 방식은 오늘날 고엔트로피의 시대에 적절한 형식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멈추지 말아야 할 가치들이다. 현대예술이 물어야 할 가치를 재료적 측면에서 강구한다는 점에서 정재영의 재료 선택은 다시 가능성의 시작이기도 하다.

필자가 보기에 정재영의 작품은 적은 것이 많은 것이다(Less is More)라는 의미의 경제적 생산효과보다는 작은 것들을 모아 크게 만드는(Smaller is Bigger), 즉 시각적 생산효과에 흥미가 유발되는 것이다. 정재영이 의미를 만드는 것보다는 시각의 놀이에 좀 더 푹 빠졌음 좋겠다. 재료를 선택해서 좀 더 가지고 놀았음 좋겠다.

정형탁(컨템포러리아트저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