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종하는 카우치 미학

                                                                                 정형탁 | 컨템포러리아트저널 편집장

소묘를 뛰어나게 잘 그리는 슈투트가르트 출신의 젊은 여인이 초대 전시회에서 어느 평론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그는 악의적인 의도는 없었고, 그녀를 북돋아 줄 생각이었다.

"당신 작품은 재능이 있고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평론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젊은 여인은 그의 논평을 곧 잊어버렸다. 그러나 이틀 후 그 평론가의 비평이 신문에 실렸다. <그 젊은 여류 화가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작품들은 첫눈에 많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것들은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

 

이제 예술의 영역에 새로운 것은 없다. 예술의 종말, 미술사의 종말, 역사의 종말처럼. 새로울 것 없는 세상에 깊이에의 강요라니.

2011년 한겨레문학상 수장작인 장강명의 『표백』이라는 소설은 깊이 없는 세상에 대한 풍경화다. 소설은 자살하는 20대 세대를 그린다. 주인공은 오늘날 기성세대가 구축한 세대를 ‘완전한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50․ 60년대 좌우 이데올로기와 산업화세대, 70․80년대 민주화 세대, 90년대 대중문화 세대는 모두 나름대로 커다란 업적이 있고 목표가 뚜렷했다. 모든 시스템이 그렇게 작동했다. 78년생 이후 세대인 소위 88만원 세대인 20대는 ‘화염병을 들고 있지만 던질 곳이 없는’ 세대로 묘사된다. ‘완전한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란 고작 소수자인권운동이거나 소비자보호운동, 여성운동이라는 것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 둘 공동체나 세상에 균열을 내는 방식으로 자살을 선택한다.

풍경화에 깊이가 없다는 평론가의 말 때문에 자살을 선택한 화가의 이야기나 ‘완전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질’ 곳도 없는 청춘들에게 웬 깊이와 자살 타령인가.

 

좋아하는 영화나 책은 특별히 없어요. 그냥 유행하는 영화, 현재 상영하는 영화를 주로 보는 편이구요, 책도 베스트셀러 위주로 읽곤 해요.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 것들, 지금의 트랜드를 읽을 수 있는 매체들을 손쉽게 찾아보는 편이에요. 솔직히 말하면 영화보다는 티비를 좋아하구요, 책보다는 잡지를 좋아해요. 평소 좋아하는 건 쇼핑 좋아하구요, 커피숍에 앉아 사람 구경하는 거, 친구들 만나 수다 떠는 거 좋아해요. 길거리를 지나가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티비를 보다가, 컴퓨터를 하다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좋은 생각이 나곤하거든요. 일상 속에서 얻은 모티브를 가지고 자기전이나 작업실에서 생각을 확장시켜 작업으로 옮기곤 해요. 작품을 소통의 매개체라고 봤을 때 혼자서 골똘히 만들어낸 탄생물 보다는 일상에서, 생활 속에서 얻은 아이디어가 조금은 친숙하게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많은 젊은 작가들이 그렇듯 김민형 역시 카우치(Couch) 미학을 표방한다. ‘좋아하는 걸’ 한다. 시각적으로 편안하며 다루는 소재는 쇼핑, 일상과 미디어 이미지이다. 90년대 초 <쇼핑백>작업을 시작으로 유명해 진 실비 플뢰리(Sylvie Fleury)가 떠오르기도 하다. 플뢰리가 패션, 뷰티, 쇼핑에서 작업의 소재를 찾는 것처럼 김민형 역시 이런 것에서 작품의 힌트를 얻는다. 우리는 이를 패션과 예술의 상호교류라 볼 수도 있고 상품-작품-상품으로 순환하는 팝아트의 궤적을 그려볼 수도 있다.

소비가 주체적 활동이 아닌 자본에 의해 끌려가는 활동이라고 본다면, 그래서 그것이 소위 만들어진 욕망이라고 본다면 그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중요하다. 그것 자체로 충분히 실험적이며 정치적일 수 있고 예술적일 수 있다. 앤디 워홀은 이미 그것을 간파했다.

“한 여자 친구가 내게 물었지. ‘앤디는 뭘 가장 사랑해?’라로 말이지. 그 질문을 받은 이후 난 돈을 그리기 시작했어.”-도널드 톰슨,『은밀한 갤러리』중에서

20세기 미국 문화를 대변한 앤디 워홀은 예술의 속물성을 속물적 방식으로 전치시켰다. 여기서 더 나아간 데미안 허스트는 스스로 미술 자본이 되길 원한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미술 작품을 제작한다. 스스로 상품이 되고자 하는 몸부림. 이제 예술은 시장(아트 페어)에 가야 볼 수 있고 살 수 있다. 소비와 자아도취의 문화에 흠뻑 취한 듯한 이런 현대미술에 웬 깊이 타령이란 말인가?

작가 김민형의 작품은 차이가 강조된다. 다양한 하이힐의 차이들. 임신한 신발, 성기가 붙어 있는 신발, 코르셋으로 묶인 신발, 돼지다리가 된 신발… 그녀는 작품이 페미니스트들이 주창하는 ‘자본이 상위 가치를 점유하고 성과 욕망과 쾌락이 하위가치로 종속’된 이미지로 읽히거나 ‘섹시하거나 여성적이며 수동적이거나 연약한’ 이미지로서 남성적 욕망 모두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니까 온전히 소비문화의 이미지를 흡수하고 그것을 변형할 뿐 어떤 저항의 몸짓이거나 주체적 활동의 이미지로 읽히지 않는다. 작가는 가부장적 욕망으로 여성 주체를 억압하는 페미니즘의 시선 역시 부담스러워하는 건 아닐까. 작가 스스로도 그것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하니 이를 포스트팝이라 해야 하나, 아니면 초자본주의의 새로운 주체라고 해야 하나, 당혹스러울 뿐이다. 필자가 깊이를 찾아서일까? 무엇보다 그녀의 하이힐은 근대 이후에 탄생한 ‘구경꾼’의 시선이 배여 있는 건 틀림없다. 파리 신시가지를 걸으며 도시를 사색한 모던 보이들처럼.

필자가 오히려 시선이 가는 건 그녀의 드로잉이다. 드로잉에선 소재 선택의 다양함과 사물을 바라보는 ‘노는 자’의 시선, 개성과 창조성이 깃들어 있다.

구두 한 켤레로 깊이를 강요하거나 그럴 생각은 없다. 그녀의 드로잉은 깊이를 상쇄하고 남을 알레고리가 엿보인다. 드로잉이 입체가 되거나 설치가 되거나 그 어떤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커 보인다. 무한히 변종하는 리좀처럼 말이다.

 

정형탁(계간 컨템포러리아트저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