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연 최성임의 The Emptiness The Traveling
'
삶의 무늬를 짜는 예술'

 

                                                                                     글: 이선영 (미술평론)

   김서연과 최성임의 2인 전이 열린 대안 공간 눈은 수원시 북수동 주택가의 오래된 집을 전시장으로 개조한 곳으로, 풀이 자라는 작은 마당으로 뚫린 창문이 있는 한옥이다. 그 동네는 아직 꼬불꼬불한 골목이 남아 있으며, 전시장 주변의 야트막한 낡은 집들은 지역문화의 한 중심에서 발산하는 힘에 도미노처럼 감염된 듯, 화사하게 단장되어 있다. 관객은 생존지상주의라는 생태계의 질서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한 큰길가의 삭막한 풍경과 사뭇 다른 길목에 들어서게 된다. 회색빛 칙칙함에서 갑자기 밝아지는 공간으로의 진입은 자신들이 뿌리내린 자리를 작은 유토피아로 변모시킨 이들이 만들어낸 의지의 결집체이다. 이러한 확연한 대조에서, 문화와 예술은 단순한 현실 반영이 아니라, 언제 열매를 맺을지 기약이 없는 씨를 뿌리고 끝없이 가꾸어 나가는 의지의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이 독특한 장소에서 두 작가는 ‘비움’와 ‘여행’을 시도한다.

 이전의 것을 깡그리 밀어내고, 같은 욕망에 의한 산물을 끝없이 복제하면서 그 안을 가득 채우려하고 스스로도 그 안에 갇혀버린 현대인의 전형적인 삶의 패턴을 비워내고 떠나려는 것이다. 소유와 정착에 기반 하는 현실적 삶 속에서 비움과 떠남은 쉽지 않다. 현실 속에서 비움과 떠남은 부족함과 쫒김이 대신하곤 한다. 자연을 ‘극복’하고 성립된 인간 사회 자체가 자연스러운 필요의 충족을 넘어서는 끝없는 욕망으로 추동되기에, 비움과 떠남이라는 이들의 주제는 단지 예술이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주제 중의 하나라기 보다는, 종교적 수행(또는 여행)에 더욱 가까운 듯하다. 비움과 떠남의 관계는 일견 자명하게 다가온다. 비워야 떠날 수 있고, 떠나려면 비워야 하는 것이다. 이 전시의 작품들은 개성을 표현하거나 현실을 반영하는 전형적인 예술 개념과는 거리가 있다. 바깥에 있어야 할 예술 역시 사회의 중심을 향해 내가 주축이 되어 움직이는 목적 지향적 행동의 하나로 변질된 마당에, 전형적인 의미의 예술을 버리는 것은 예술의 본령으로 돌아가려는 작은 몸짓일 수 있다.

 서울에서 작업실을 같이 쓰는 두 작가는 집을 닮은 이 전시장에서 자신의 일상 공간에서도 할 수 있는 작은 작품들로 비움과 떠남을 실행했다. 그것들은 작지만 일상의 한 모퉁이를 장식하는 ‘소품’들은 아니며, ‘본격 예술작품’에 비해 정신적 육체적 노동이 덜 투여된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생활인으로서 삶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것만큼이나 절박한 어떤 의지의 산물이다. 삶은 예술의 방해꾼처럼 보이지만, 예술의 진면목은 삶의 한 가운데서 발견될 수 있다. 예술은 진정한 삶에 도달하는 결정적 통로이며, 삶 또한 예술에 그러하다. 삶과 예술 중 하나라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이중의 긍정이 가능한 자 만이 진정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긍정은 단순한 불평불만에 머물고 마는 부정보다 더 가치 있다. 긍정은 더 뛰어난 감각까지는 아닐지라도 더 강인한 자질을 필요로 한다. 감각을 현실 속에서 실현시키는 힘 또한 이러한 자질이다. 이중의 긍정이 가능하지 않다면 감각은 머릿속에만 머물며, 타자와의 소통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것들은 전시장에 걸린 작품이기도 하지만, 현실 공간에 놓여 진 물건들처럼도 보인다. 황금이불은 이전에 온돌이었을 바닥면에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을 반사하며 깔려 있으며, 벽에 빳빳하게 걸린 검은 레이스는 벽지무늬나 커튼처럼 보이기도 한다. 김서연의 [검은 레이스]와 최성임의 [황금이불]은 화려한 카리스마를 연상시키는 작품 제목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는 캔버스의 초라한 골격을 드러내는 구멍 숭숭 뚫린 꽃무늬 패턴을, 다른 하나는 번쩍거리는 일회용 포장 끈으로 짠 덮개이다. 그 뒤와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것들은 현실의 부재를 감추면서도 드러낸다. 통상적인 하얀 레이스가 아닌 검은 레이스, 그리고 신체를 포근히 감싸는 섬유로 짜여 지지 않은 금속성 덮개는 죽음이나 부장품 같은 분위기가 있다. 삶의 굴곡 면을 따라 부드럽게 늘어져야 할 레이스와 이불은 경직되어 있다. 화려함이라는 삶의 정점에서 죽음이 어른거린다. 예술은 언뜻 대조되어 보이는 두 범주를 교차시킨다.

 레이스나 이불이 연상시키는 사랑 또한 삶과 죽음을 연결시킨다. 사랑과 예술을 그토록 충만하게 하는 것은 죽음의 심연이다. 예술은 롤랑 바르트가 [사랑의 단상]에서 말한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을 사랑의 편지’와 유사하다. 그것은 ‘찬란한 사랑의 의무에서 온 일’이지만, 동시에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다. 그것에 내재된 절박한 진실은 지나침이라는 광기와 결합된다는 공통점도 있다. 최초의 강렬함을 선물했던 사랑과 예술이 희석되거나 진부한 것으로 끝장나지 않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갱신이 필요하다. 갱신은 단순한 반복이나 손이 게으른 몽상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파기와 짜기라는 그들의 방법론에 내재된 반복은 삶의 재생산이자 죽음을 내재한 일상적 반복과 유사하다. 생존, 즉 삶의 유지와 재생산은 그자체로도 대단한 것이지만, 그것에만 머물 수 밖에 없을 때 삶은 기계적 반복, 즉 죽음의 면모를 띈다. 죽음과도 유사한 단순한 지속을 거부하고 격렬하게 타오르려 해도 역시 죽음과 가까워진다.

 그래도 작가라는 존재는 일상의 기계적 반복이 야기하는 죽음,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려다 위험에 처해지는 또 다른 죽음 중에서 후자를 선택하는 비장한 족속들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사회는 죽음에 가까운 일상을 생동하게 하는 예술가들을 죽음에 가까운 고독에 방치하곤 한다. [검은 레이스]와 [황금 이불]은 만들어지는 방식이나 상징에서 일상과 예술에 내재한 두 가지 죽음에 걸쳐 있다. 검은 레이스는 미망인의 슬픈 얼굴을 가리는 미사포가, 황금 이불에서 봉긋 솟아오른 굴곡 면들은 무덤을 떠오르게 한다. 하나는 어둡고 하나는 밝지만 모두 차갑다. 뜨거운 열정을 숨긴 듯한 검은 레이스와 황금이불은 미지근하기 보다는 차라리 차갑기를 택한다. 검은 레이스는 풀이 매겨진 듯 빳빳하여 잘못 만지면 베일 듯하며, 낱장의 황금 이불은 그것을 덮은 이의 체온을 결코 유지시켜 주지 못할 것이다. 그것들은 일상의 사물과 매우 닮아있으면서도 필요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다. 소소한 유용성으로부터 벗어난 이 낯선 사물들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잔뜩 날이 서있다.

 가학 피학적이다 싶은 작업 방법론은 삶, 그리고 예술과 함께 하는 삶이 야기하는 상처가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피 흘리는 현실이 아니라, 무늬로 고양된다. 삶의 무늬가 바로 예술이다. [검은 레이스] 옆에 걸린 것은 송곳 같은 날카로운 도구로 긁어서 자국을 남긴 빈 종이이며, [황금 이불] 위에 걸린 것은 가느다란 드로잉은 보충이자 부연이다. 김서연의 ‘드로잉’은 행위의 흔적으로만 남아 있으며, 최성임의 드로잉은 두서없이 끝없는 과정만 있다. 하나는 강하게 힘을 주었지만 형태로 남아있지 않고, 다른 하나는 배경과 형상이 구별되지 않을 만큼 가득하지만 무엇인지 불확실하다. 축 늘어지거나 주름져 있는 그들의 선은,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중요한 기원으로부터 출발하여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강한 지향성이 발견되지는 않는다고 해서 맥 빠진 형상들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김서연의 축 늘어진 형상(자국)에는 바탕의 물리적 저항을 이겨내려는 적극적인 행동이 있으며, 최성임의 드로잉에는 기승전결이 없는 그 막연한 이야기를 끝없이 이어가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그러나 신경 줄을 긁는 듯한 선이나 무덤을 닮은 무지개의 흐릿한 형태는 작가들이 삶과 예술에 기대하는 희망의 상태 또한 알려주는 듯하다. 검은 레이스 뒤편에 진면목을 보여 주어야할 현실은 가느다란 각목들로 지지되고 있을 뿐이며, 밥공기처럼 엎어진 무지개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 같다. 자못 예쁘기까지한 그것들은 허공과 허기에 직면하게 한다. 드로잉이라는 가벼운 형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난히 그들의 작품에는 강한 의미의 표현이나 재현이 없다. 그들이 짜는 레이스나 덮개 또한 강한 의미의 예술 ‘작품(work)이라기보다는 텍스트’(바르트)이다. 작품뿐 아니라, 현실 역시 텍스트로 간주된다. 현실은 텍스트 외부에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텍스트이며, 이들의 작품에서 예술과 일상은 함께 짜여 진다. 그것들은 같은 질과 차원을 가지기에 이물감 없이 함께 직조될 수 있다. 둔탁한 이원적 구조가 아니라, 한 장으로 유연하게 펄럭이는 텍스트는 삶과 분리된 예술을 양자가 구분 불가능한 하나의 과정으로 압축시키려는 노력이다.

 작품과 달리 텍스트는 의미를 확정하는 하나의 기원과 종결 점을 가정하지 않는다. 결정적 의미는 계속 지연된 채, 끝없는 반복과 해석이 있을 뿐이다. 이들에게 예술은 따로 정해진 시공간 속에서 노동처럼 수행되는 것이기 보다는, 확고하고도 실증적인 일상의 진리가 느슨해지고 느릿해지는 순간을 조밀하게 잠식하는 것이다. 이들의 작품이 표방하는 ‘비움’과 ‘떠남’은 지금 현재하는 것들이 그 자체의 자명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재와의 차이적 관계에 의해 산출된다는 점을 예시한다. 바르트가 말했듯이 언어는 부재에서 태어난다. 부재를 메우려는 끝없는 일 또는 놀이 자체가 실체가 된다. 현대의 해체론적 사고는 현재 존재하는 것이 항상 결핍된 상태에 있음을 말한다. 이들의 작품에는 이러한 근본적 결핍을 채우려는 끝없는 보충이 있다. 현실은 단단한 지반을 잃고 보충과 반복 변화하는 운동으로 대체된다. 동어반복처럼 보이는 작업과정들은 단순한 반복이 아닌, 회귀를 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