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훈 개인전 전시비평

분열적 자아와 ‘에고 모나드’의 욕망

                                                                               김성호 | 미술평론가

에고 메커니즘과 분열적 자아.

조성훈은 '에고 메커니즘(Ego mechanism)'이라는 주제 아래 자아의 분열증적 양상을 탐구한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화가들이 남긴 자화상은 자신의 모습을 대면하면서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재성찰하려는 자아 탐구의 일환이었다. 자화상이란 세계를 대면하는 한 예술가가 궁극적인 질문을 던지는 가장 근원적인 방식이었던 것이다. 조성훈의 작업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다.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무수한 인물들은 실상 조성훈 자신의 모습이다. 그것은 무수한 인물들이 모여 있는 군집 초상에서조차 자신의 분신들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어 서로가 밀담하거나, 서로가 이견을 보이며 다툼을 벌이고 있을 때에도, 혹은 서로가 살아남기 위해 경쟁할 때에도 각 인물 주체들은 작가 조성훈의 분신들임을 똑 같은 얼굴, 똑 같은 복장들을 통해서 드러내 보여준다.

조성훈의 분신들은 일견, 개인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는 인간 존재론을 여실하게 드러내는 하나의 은유가 된다. 개별 정체성들이 어울려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인간사회에 대한 은유 말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의 근간에는 인간 개체들이 관계를 맺고 동거하는 공동사회에 대한 관심 보다는 자아라는 주체에 대한 관심이 유독 집요하게 자리한다. 결국 나로부터 비롯되는 인간 존재론을 자신의 실존적 경험을 통해서 탐구하려는 경향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작가에게 '나' 혹은 '우리'로 인식되는 주체들이 똑같은 외양을 가진 채 각자 다른 양상으로 어떠한 행동들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바닥에 드러누운 채 낮잠에 빠져든 '그들'(조성훈에게 있어서 나 혹은 우리), 벽에 매달려 있는 그들은 특별히 타자들을 의식하거나 경쟁하지 않지만 똑같은 외양을 한 채, 같은 행동을 각자 다른 모습들로 선보인다.

나아가 그의 작품에는 이러한 '나' 혹은 '우리' 사이에서 서로 경쟁을 벌이거나 논쟁을 벌이는 등 일련의 상호작용을 부단히 수행하는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작품 〈먼저 오르기〉에서 기다란 봉을 타고 서로 먼저 오르려는 모습은 경쟁 사회를 살고 있는 현대인의 초상이자, 자아의 쌍생아들이 벌이는 내면에의 투쟁이기도 하다. 그것은 작가 자신의 복제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이 시대의 풍자이자, 자신의 조형언어를 통해 시도하는 인간 존재론에 대한 내적 성찰로부터 비롯된다. 작품 〈내가 내 뒤통수를 치게 되는 상황〉이란 제명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풍자적 언어에 기초한 자신의 내적 성찰이 잘 드러나 있다. 인간 주체의 우연적이고도 본능적인 자기애적 행동이 결국 자신에게 피해를 입히는 상황이 될 수 있음을 ‘뼈 있는 농담’과 같은 풍자의 언어로 자신의 인간관을 재성찰하고 있는 것이다.

그 뿐인가? 자신의 분신들이 서로의 머리를 깎아주고 있는 작품 〈SELF CUT〉이나, 마술의 절단 쇼에서 자신을 실험의 도구를 삼기를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우스꽝스럽게 몸을 웅크려 자신을 보호하려고 애쓰는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는 작품 〈MONKEY MAGIC〉에서 그는 사사로운 것들을 뒤틀어보고, 삐딱하게 보려는 일련의 촌철살인의 풍자적 인식을 보여준다. 또한 작품〈충돌〉에서는, 같은 벽을 칠한다는 목표는 같되 그 방법론의 다름으로 인해 갈등하고 반목하면서 자아가 분열되는 양상을 풍자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흰색으로 페인팅하는 좌측의 '나(우리)'와 검은색으로 페인팅하는 우측의 '나(우리)'는 행동의 방식이 다름으로 인해 종국에 부딪히고 싸운다.

조강훈은 이러한 분열적 자아의 양상들을 풍자적이고 위트 있는 방식으로 표현해내면서, 그가 생각하고 있는 일련의 '에코 메카니즘'을 밝히려고 애쓴다. 그것은 프로이트(Freud)식으로 '본능적 자아(id)'와 '초자아(super-ego)' 사이에서 번민하고 갈등하는 '에고(ego)'의 모습조차 스스로 분열되는 주체임을 밝히려고 하는 듯이 보이기조차 한다. 달리 말해, 그가 그리는 에고 메커니즘은 이성적 주체로 간주되는 에고(ego)가 심리적 기제에 의해서 작동하기 보다는 최소한의 존재라는 모나드(monad)의 조합으로 인식하는 '의사(擬似) 과학적 사유'의 일단을 드러낸다.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문제가 해결되어지는 과정을 살펴보면 자아의 메커니즘을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단언하는 그의 입장에서 유추되듯이, 그의 작업은 복잡다기한 인간 행동의 '문제 해결 과정'을 의사과학적인 조형언어를 통해서 탐구함으로써 에고 메커니즘을 밝혀내려는 것에 집중된다. 달리 말해 그의 '에고 메커니즘'이라는 주제의식은 인간행동을 모나드의 결합과 연동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사회적 인간 존재론이 아닌 '의사과학적 인간 존재론'으로 탐구하는 것이라 하겠다.

에고 모나드와 욕망의 인간기계론

그의 '에고 모나드'는 인간 존재의 삶의 질곡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희로애락의 다양한 표정조차 모나드들의 관계들이 맺는 교집합, 합집합의 양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사 과학적 사유에 기초한다. 이 지점은 그의 작품 읽기에서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라 하겠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인간 심리의 복잡 미묘한 양상마저 기계의 부속들이 접속해서 만들어내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기계인간, 혹은 인간기계를 유추케 함으로써 그의 작업을 한편으로는 매우 이성적이게 함과 동시에 건조하게 만드는 양면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작가 조강훈이 의도하는 것이다. 복잡다기하고 해석 불가능한 유기적인 생명체 현상의 근원을 과학적 사유(그것은 분명코 의사과학적 사유이다.)를 통해서 통찰함으로써, 우리의 '관성적인 인간 인식' 자체에 제동을 걸고 다른 방식으로 인간 보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레슬링을 하고 있거나 싸움을 일삼고 있는 자아의 분열체들은 단순한 인간 사회를 풍자하는 심리적 작법에 기대고 있기 보다는 에고 자체가 애초의 모나드로 분절되어서 상호작용하는 가운데서 나타난 현상임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통찰을 달리 시도하려는 것이다. '나는 너가 되고 너는 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러한 자아의 분열체들은 실상 보다 근원적인 '내 안의 너와 나'를 탐구함으로써 비로소 이해될 수 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A라는 제명을 지니고 있는 일련의 'A 시리즈 작품들'에서는 이러한 모나드의 병치와 관계항에 따라 형성되는 '자기복제 이미지의 증식'을 탐구한다. 특정 사건에 가담하고 있는 군상들이 실제로는 자신의 자기복제 이미지들이며, 그것이 서로 친밀하거나 반목하는 관계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결국 그의 '에고 모나드'에 근거하고 있음을 지속적으로 탐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달리는 사람의 역상 이미지는 마치 화학이나 물리학의 모나드 구조들로 연계하거나, 누워있는 인물의 다리 역시 이러한 모나드들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치 그것은 모나드로 만들어진 사이보그, 기계인간처럼 보인다. 가히 '인간기계론(human mechanism)'이라 할 만하다. 물론 그가 사용하는 주제어 '에고 메커니즘'에서 메커니즘(mechanism)이 기계론을 의미하기보다는 "사물의 작용 원리나 구조"를 지칭하고 있긴 하지만, 그의 작품의 견지하는 차원은 "모든 현상을 자연적 인과 관계와 역학적 법칙으로 설명"하는 기계론에 밀접하게 관계한다. 그것은 '라 메트리(La mettrie)'의 '인간기계(L'homme -machine)가 고찰하는 다음과 같은 요지, '구성 요소에 대한 개별적 분석과 그 결과의 중합을 통해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는 관점과 부분의 합이 전체와 일치한다는 선형적 세계관'을 드러낸다. 이렇듯 부분과 집합이라는 인간 주체의 행동들을 면밀히 탐구하는 그의 작품에서 '세상의 모든 변화는 필연적인 인과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는 기계론에 관한 해석들을 어렵지 않게 살펴볼 수 있다.

그의 또 다른 작품들인, 'B 시리즈의 작품들'에서는 이러한 그의 에고 모나드에 근거한 인간기계론이 보다 더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예를 들면, 인간 군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인간 개인 주체를 마치 해부도처럼 분절해서 보여주고 있는 작품들은, 인간의 표정 자체가 인간 뇌의 작동에 근거하고 있음을, 인간의 일련의 행동 자체가 그가 주장하는 '에고 모나드'의 조합의 소산임을 거듭 강조한다. 그는 자화상을 이리저리 쪼개고 희로애락의 표정들을 선묘 드로잉으로 허구화시키는 회화적 전략들을 통해서 '에고 모나드'를 탐구한다. 이러한 인간기계론적 탐구는 그의 회화를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 이론의 조형적 탐구에까지 나아가게 한다. 즉 복잡한 기계가 '자가 규제 시스템(self regulating system)'에 의해서 작동하고 있듯이, 생동하는 인간 존재 역시 외부로부터 얻어지는 정보를 수용하는 감각기관들이 실행하는 행동 메커니즘에 의해서 작동하는 것이라는 사유가 그의 작업에 포진하는 것이다.

비판적 논점 : '욕망 생산의 기계론'으로부터 '욕망 생산/소비의 기계주의'로

그의 작품세계에서 남겨진 관건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의 회화는 의사과학적 인간 탐구의 통찰을 통해 분명코 '인간존재에 대한 다르게 보기'를 표상하고 있지만, 그것이 단지 아이디어 차원에서 시리즈물을 구축해나가는데 골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비판이 가능할 수 있다. '건조한 의사과학적 사유'에 '질펀한 뼈 있는 농담과 풍자, 위트'를 교차시키는 그의 회화전략은 자못 흥미로운 지점이지만, 패턴처럼 반복되는 분절과 조합의 양상이 마치 양식화처럼 반복될 위험 또한 없지 않다. 그의 회화적 형식이 한편으로는 그의 주제를 명백하게 잘 드러내는 작업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리즈물로 전락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배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편으로 그의 작품은 이러한 패턴화의 건조함으로부터 탈피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분명코 지니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인간 기계론(mechanism)이 '과학적'이기보다는 '의사과학적' 입장을 분명히 하는 만큼, '들뢰즈(Deleuze)의 기계주의(machinism)'와 같은 탈기계론(anti-mechanism)의 관점을 얼핏얼핏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표방하는 메카니즘이란 구조적인 통일성에 기반한 기계론을 탈피할 뿐만 아니라 유기체의 특유한 개체적 통일성(일테면 기관으로 구조화된 신체)에 기반한 유기체주의에도 비켜 서 있다. 엄밀하게 말해 그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하거나 어정쩡하게 서 있는 편이라 하겠다. 그의 작품에서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가 인간 주체를 코드화하는(혹은 길들이는) 욕망의 담론이 표피만 드러낼 뿐, 선명하게 잘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미지의 모호함을 통해 조형 메시지의 다의성을 드러내기를 지향하는 것도 아닌 만큼, 이 부분은 분명코 향후 그의 작업에서 새로이 성찰할 하나의 지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작업에서, '에고 모나드'를 통해 살피는 의사과학적 방법과 사회풍자, 위트와 같은 방식을 혼용하여 인간 존재론을 재성찰하는 것은 분명코 유의미하다. 다만,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에 동화될 수 있는 심리적 인터랙션이 보다 더 고려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런 차원에서, 욕망의 생산적 구조를 논리적으로 밝히는 태도로부터 욕망의 생산/소비의 상호작용구조를 보다 유연하게 탐구하는 방식으로 변모한다면, 그의 회화가 주제에 관련하여 보다 풍부한 회화의 언어로 나설 수도 있겠다. 그런 면에서 그가 성찰하는 다음과 같은 작가노트에서의 화두는 향후 작업을 풀어나가는 하나의 키워드가 될 수도 있겠다. : "본능모나드는 자아모나드와 다른 범주에 있으며 카오스의 상태에서도 그 활동을 멈추지도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