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한겸 작가 <어떤, 아이> 리뷰

                                                                               김진영 | 북수동 주민, 교사

어릴 적 나는 늦게까지 장사를 하시던 부모님으로 인해, 천장이 높은 빈 방안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무료한 시간을 견디다 까무룩 잠이 들면, 잠에서 깨어 의식이 돌아오기 전까지 사이 몽롱한 상태의 공백이 존재했다. 때로는 천장이 아래로 쿵쿵쿵 내려오기도, 양쪽의 벽이 흐물거리며 녹아내리기도. 알 수 없는 그림자들이 방안을 떠돌며 음산한 소리를 내지르기도 했다. 어린 날의 외로운 삶 속에 들어차 있던 공포와 불안은 그런 형태로 내 의식 속에 존재했다.

어릴 적에 나는 더 많이 울었다. 친구를 더 자주 미워하기도 했고, 더 자주 안절부절했다. 남 탓하기를 좋아했었고, 하기 싫은 일 앞에서는 더 많이 숨었다. 그러다 차차 나이를 먹어가면서 세상이 크게 두렵지만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방법도 터득할 수 있었다. 우는 날은 여전히 있었지만, 아주 가끔. 많이 서러운 날만 울게 되었다. 더 이상 천장도 벽도 환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아이들을 햇살, 봄, 꽃과 같은 존재로 인식한다. 우리들이 그 존재들을 통해 보고 싶은 이미지다. 밀란 쿤데라의 작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 속의 한 부분이다. 한 상원의원이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내가 행복이라 부르는 것이 바로 저런 것이다. 라고 말하자 작품 속의 사비나는 의문을 갖는다. 어떻게 어린아이들이 행복을 의미한다는 걸 알수 있겠냐는 것이다. 만약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그들 중 세 명이 네 번째 아이에게 달려들어 그 아이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면 어떻겠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그런 모습은 인정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골라서 보기 때문. 키치의 세계다.

우리는 잊었다. 내 어릴 적의 심란을. 그 얕은 사고 안에서도 얼마나 많은 생각들로 흔들리고 어수선 했었는지를. 아이들의 환한 미소만, 까르르 흩어지는 웃음소리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이미지는 아니다. 나는 서한겸 작가의 그림들을 바라보며 대상을 ‘아이들’이라는 거대하게 이미지화된 덩어리로서가 아닌 <어떤 아이>라는 개별적 존재로 오랫동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내 어린 날의 나라는 <어떤 아이>에 대한 객관적 조우이기도 했다. 반갑다. 그의 시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