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지론, 실존의 감성적 토대를 찾아서 

                                                                                김도일 | 대구 가톨릭대학교 교수

이 글은 한상진의 2013년 개인전 <유형지(流刑地)에서>를 비평적 관점에서 이해해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의 작업에 대해서 여러 접근이 가능할 테지만 여기서 나는 몇 가지 키워드를 설정하고 그 키워드를 문제 해결의 단서로 삼아 접근하는 방식을 취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접근은 다분히 주관적인 경향성을 띠게 될 것이다. ‘아마도’와 ‘어쩌면’을 남발하는 글쓰기. 이로써 글은 객관적 설득력을 놓치게 될 것이지만 그만큼 현재 시점에서 나의 한상진 이해를 드러내는 데는 효과적일 수 있다.

1. 유형지(流刑地)

먼저 전시제목인 <유형지(流刑地)에서>에 대해서 언급해 보기로 하자. 유형(流刑)의 사전적 정의는 ‘죄인을 귀양보내는 형벌’이고 ‘유형지’는 ‘죄인이 유형살이를 하는 곳’을 뜻한다. 이러한 제목은 우선 근래 생활과 작업의 근거지였던 서울을 떠나 한동안 경기도 일산과 파주의 외딴 곳에 작업실을 두고 생활했던 한상진의 개인적 사정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더불어 이러한 개인사는 한상진 작업에 특징적인 ‘본래 있어야 할 곳에서 떨어져 있다는 느낌’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서울에서 일산으로 일산에서 파주로, 자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나는 어느새 이렇게, 점점, 무언가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에 익숙해져있다. 공장 앞 논두렁 가에 앉아 이름 모를 넝쿨 잎을 그려 넣었다. 최근의 작품은 이렇게 쓸모를 다하거나 버려진 것, 그러나 새로운 가능성을 지닌, 감지하는 매혹에서부터 시작된다(한상진 작가노트, 2013)”

한상진 자신의 표현을 빌어 “무언가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화가는 (자신과 마찬가지의 상황에 놓인) “쓸모를 다하거나 버려진 것”에 애착을 갖는다. 실제로 2000년대 중반에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한 때부터 이 화가의 작업에는 줄곧 어떤 ‘고향상실’ 또는 ‘노스탤지어’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노스탤지어를 그 어원을 참조하여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한다면 한상진의 작업에는 분명 ‘그리운 어떤 곳으로부터 떨어져 있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그 때문에 몹시 아프다’는 느낌, 또는 정조(情調)가 항상 두드러졌다. 그래서 그의 작업을 두고‘노스탤직’하다고 말할 수 있다. 같은 이유로 한상진의 작업을 “낭만적이다”라고 보는 것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낭만적 경향의 작가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감정의 격앙이나 흥분을 한상진의 작업에서 찾아보기란 매우 어렵다. 오히려 지배적인 것은 극도로 절제된 화면 구성과 지극히 차분한 조용한 울림이다. 그의 붓질은 격렬해 보이는 순간에도 차분하다. 거기에는 토로(吐露)의 느낌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아픔을 토로하기보다는 그 아픔을 관찰하는 식으로 작업한다. 곧 한상진의 작법(作法)은 ‘나를 아프게 하는 것’, ‘아프게 나를 찔러오는 것’에 반응하여 아파하면서 그것을 관찰하는 식으로 작동한다. 오래 전에 나는 이러한 양상을 마르셀 프루스트의 ‘비자발적 기억(mémoire involontaire)’과 관련하여 설명했는데 지금도 꽤 적절한 전유였다는 생각이다. 가령 초기 시절에 그는 담벼락에 비친 개나리 그림자를 그렸다. 개나리 그림자는 ‘개나리’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이다. 그것이 “무언가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화가를 꽤 뚫는다. 그 시절 그는 이렇게 자신을 찔러온 것을 프루스트처럼 또는 (카메라 루시다의) 바르트처럼 더듬었다. 개나리 그림자의 절단된 파편이미지들, 그 독특한 실루엣들, 캔버스 위에 (칠해졌다기보다는) 덧붙은 물감들은 아픔의 근원을 찾아 기억을 더듬은 자(者)가 남긴 흔적들이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더듬기는 그 아픔의 근원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가 없다. 그것은 파악됐다고 여겨지는 순간에 부서진다. 또는 구름처럼 흩어진다. 그러니 결국 먼 것은 가까워질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유형지’는 꽤 설득력있는 비유다. 유형지는 속성상 자발적으로 또는 자신의 의지로 벗어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언제든 마음 내킬 때 떠나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바로 유형지다.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 다가가려는 노력, 본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들이란 처음부터 실패를 예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다가가는 것의 실패가 예정되어 있는 유형지, 이곳이 바로 한상진 작업의 거처다(그러고 보니 일산으로, 파주로 이주하기 전, 그러니까 서울에 있을 때에도 그의 작업실은 항상 외부와 차단된 마치 고립된 섬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예고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한 화가로 하여금 자꾸만 어딘가로 다가가게끔 하고 무언가를 더듬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2. 프란츠 카프카

사실 <유형지에서>는 프란츠 카프카의 한 단편 제목이다. 이 단편에는 어떤‘사형 집행기계’에 대한 이상한 신념에 사로잡힌 장교가 등장한다. 하지만 그 기계는 그가 원했던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기 위해, 또는 관철시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그 기계에 눕히지만 그것은 아주 덧없고 당황스러운 그 자신의 죽음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어떤 어긋남의 이야기다. 카프카가 다른 소설에서 묘사한 ‘진입하고자 배회하지만 끝내 진입할 수 없는 성(城)’처럼 기계는 장교의 믿음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런데 한상진이 이렇게 시니컬한 카프카 단편의 제목을 자신의 전시제목에 끌어들인 이유는 무엇인가? 한상진 스스로가 “이미 시니컬하기 때문”이라고 답하면 어떨까? 앞서 나는 “거리를 좁히고 멀어진 것에 가깝게 다가가려는 노력은 실패가 예고되어 있다”고 썼거니와 지금 한상진은 -카프카를 따라- 기의에 닿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기표, 개념에 도달하지 못하는 형식에 깊이 몰두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한동안 비닐하우스 비닐 너머의 아른아른한 풍경을 그렸다는 것을 사례로 들 수 있지 않을까? 비닐 너머의 풍경은 눈으로 볼 수 있지만 확실하게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우리는 그것을 ‘확실하게 포착할 수 없다’아른아른한 풍경. 오히려 우리의 눈에 좀 더 확실하게 포착되는 것은 그 비닐의 ‘주름들’이다.

3. 메탈릭 글리터 파우더

그런데 한상진의 작업은 ‘기의에 닿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기표’ 그 이상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어느 순간부터 이 화가는 기표가 기의에 닿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양상 자체보다는 기표의 (왕복/순환) 운동을 일으키는 동인(動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카프카를 다시 꺼내면 왜 카프카 소설의 주인공은 ‘성’에 진입하기 위해서 그 주변을 배회할까? 그는 왜 그 기계에 대해 터무니없는 믿음을 갖게 된 걸까? 와 같은 물음이 던져지기 시작했다. 이 물음을 한상진의 방식으로 번역하면 “왜 나는 저기 아른거리는 비닐 너머를 보게 되었을까? 와 같은 형태가 될 것이다.“거울의 이면에 붙어있는 얇은 박피가 이미지를 가능하게 하는 것처럼”(이것은 한상진이 쓴 글에서 가져온 표현이다) 그 너머에 빛이 있다.

“사물과의 대화, 비닐하우스 너머의 아른아른하고 희미한 사물의 미미한 존재감은 커텐의 굴곡을 따라 흐느러진 사라져버릴 흔적, 빛의 흐름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는 존재와 감각의 찰나를 형용한다” (작가노트, 2012년)

이미지 자체가 아니라 이미지 너머/이면에서 이미지를 가능케 한 근원으로서 ‘빛’을 본다. 또는‘보이는 것이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실재와 만난다. 이것은 그가 왜 지난 십 여 년 간 그토록 반짝이는 것들에 열중해왔는가를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다. 반짝이와 형광물질, 메탈릭 글리터 파우더(metallic glitter powder)…, 이렇게 반짝이고 번뜩이는 찰나적인 것들과 더불어 기표의 왕복 운동은 언제나 다시 시작된다.

4. 다 먹고 남은 사과 찌꺼기

좀 더 할 이야기가 남아있다. 그것은 버려진 것, 죽은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앞에서 나는 “무언가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화가가 자신과 마찬가지의 상황에 놓인 쓸모를 다하거나 버려진 것에 애착을 갖는다.”고 썼다. 확실히 무언가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음을 느끼는 이는 그 무언가와 가까이 있던 순간을 경험한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버려진 것들은 예전에 분명 어떤 쓸모를 지니고 있었을 게다. 공터에 버려진 개의 뼈들은 또 어떤가? 그것은 잡아먹히기 전 생생하게 살아 숨 쉬며 여기저기 휘젓고 다니던 한 생명체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 모두는 하나의 흔적, 하나의 완벽한 구조물이다. 가령 다 먹고 남은 사과 찌꺼기는 그 사과를 베어 물었을 한 인간의 몸틀, 행동의 궤적을 반영하는 완벽에 가까운 구조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시피 이미 멀어진 자들, 버려진 것들, 죽은 것들은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기의에 닿으려는 기표의 왕복운동은 여기서 지극히 무력하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것들은 기의의 통제 내지는 질곡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기표다. 게다가 그것은 그 자체 완벽에 가까운 구조를 갖고 있다. 바르트라면 이것들을 ‘텅빈 기표’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기표들처럼 본래의 것, 근원적인 것에 대한 강박에 연루되기보다는 그 자체 완전히 자유로운 의미작용의 가능성을 제시할지 모른다. 한상진의 경우에 그 가능성은 캔버스에 안착한 날벌레 시체들이 그린 드로잉 궤적들, 뒷산에서 주은 죽은 동물의 구조적 양상들 같은 것이다. 기원, 근원에의 강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기표들의 의미작용은 그리움을 알지 못하는 유희다. 다시 말하건대 비닐 너머의 아른아른한 풍경보다 그 비닐의 ‘주름들’이 보다 생생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소생할 수 있을까?

5. 그들은 나를 무엇으로부터 낫게 하려는 걸까? 어떤 상태로, 어떤 삶으로 나를 다시 데려가려는 걸까?

한상진이 내게 보내온 바르트의 단상. 이 글의 결말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별로 반갑지 않은 위안들. 애도는, 우울은, 병과는 다른 것이다. 그들을 나를 무엇으로부터 낫게 하려는 걸까? 어떤 상태로, 어떤 삶으로 나를 다시 데려가려는 걸까? 애도가 하나의 작업이라면, 애도 작업을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속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도덕적 존재, 아주 귀중해진 주체다. 시스템에 통합된 그런 존재가 더는 아니다. 불멸.이 특별하고도 회의주의적인 입장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건지, 나는 한 번도 이해한 적이 없다. 그리하여 내가 아는 건, 나는 모르겠다는 사실뿐.”

(롤랑 바르트 <애도 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