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지론, 실존의 감성적 토대를 찾아서 

                                                                                김도일 | 대구 가톨릭대학교 교수

기억의 고고학

거창한 예술의 본질에 관한 그 모든 혼란과 회의가 그나마 겪을만한 의미가 있었다면, 그 혼란과 회의를 통해 예술을 예술가의 실천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확인에 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포스트모던이란 단어조차 희미해져 버린 오늘날 예술을 여전히 예술로 남게 하는 토대는 고정불변하는 초월적 예술의 본질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 시대와 세계 속에 위치한 한 예술가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교감하면서 그려낸 삶의 궤적이라 할 수 있다. 그 궤적에는 자신의 유년의 기억과 삶의 경험, 또 그 위에서 쌓여 올려지는 시간의 퇴적층이 새겨져 있다. 이 퇴적층은 또한 그 작가의 미래의 삶의 방향을 설정한다. 정연지의 작업에 대한 평자의 첫 해석 또한 그의 작업으로부터 예술가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평범한 일상적 개인으로서 그가 걸어온 흔적을, 그 흔적의 단서를 찾아내는 것이다. 

단서들은 분명해 보였다. 정연지는 연필로 어떤 풍경을 그리고 있다. 의문은 이어진다. 그는 왜 동시대 예술이 발전시켜 왔던 다양한 실험적 수단들이 아닌 '연필'을 선택했으며, 또한 왜 현대를 상징하는 그 수많은 압도적 기념비들이 아닌 소박한 동네의 풍경을 그려내고자 했을까? 연필로 그려진 그 소박한 풍경은, 생각했던 것보다 복잡한 비평적 층위를 가지고 있었다. 현재의 상황에서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설명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분명해 보이는 것은 정연지가 연필이라는 무채색의 수단을 통해 '시간'의 흐름이라는 본질적 변수를 배제하려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시간성을 배재함으로써 정지된 공간을 창출하려 한다는 것이다. 정연지는 쉼없이 스쳐지나가는 풍경들을 정지시킴으로써 삶에 대해 어떤 사유를 활성화하려 시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의해 가속화된 시간 속에서 미쳐 인식되지 못한 채 지나쳐 가는 찰나의 풍경들, 나아가 그 풍경들에 결부된 경험과 사고들을 부활시키려는 것이다.

멈춰진 시간의 저편

그러기 위해 연필은 어쩌면 가장 좋은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그려내는 기억의 단면들은 마치 몽유의 도원을 연상하게할만큼 신비한 산수 속에 자리잡은 형상의 풍경이지만 희미한 스푸마토로 휘발하지 않고 날카로운 연필 끝에서 너무나 명확하고, 생생하게 살아나고 있다. 평자는 여기서 어떤 의지를 읽는다. 그것은 기억을 기억답게 무의식의 저편으로 흘려보내려 하지 않는 어떤 강박, 어떤 절박함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어쩌면, 그 기억들, 그 풍경들이 그저 지나칠 수 없는, 정연지의 존재의 감성적 토대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약 예술가의 감수성을 예술가 개인만의 이기적 능력이 아니라 시대와 세계의 어떤 상황을 검증하는 감성의 리트머스로 읽는다면, 정연지의 시도는 혹여 기억의 망각을 통해 삶을 표준화시키려는 어떤 거대한 힘에 날카롭게 저항하려는 어떤 성찰로 읽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연지가 그 힘에 거스르는 방법은 자신의 유년과 현재를 가장 명증하게 기억하기 위해 현실을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비현실의 이미지로 남기는 것이었으리라. 노량진에서 여의도, 공덕을 넘어 광흥창으로 이어지는 거리의 모습들은 예술가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무수히 겪었을 법한 풍경이었을 것이다. 그 풍경은 그저 풍경이 아니라 그 풍경을 접하면서 자신의 삶과 의식을 거치며 현재의 자신을 한 땀 한 땀 엮어냈을 상념과 경험들의 조각임에 틀림없다. 그 조각들을 망각한다는 것은 곧 그 자신의 자아를 부정한다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이점은 이미 작가의 다음 진술에서도 확인된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의 변화를 겪으면서 나는 사라진 과거의 풍경만이 아니라, 나 자신의 유년마저 상실되는 느낌을 받았고 남아있는 기억과 흔적도 곧이어 사라지고 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연지는 자신을, 자신의 존재를 지켜내기 위해, 현재의 자신을 가능케 했던 삶의 퇴적들을 자신의 기억에서 토해내고 있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기억을 더듬는 작업은 사실 정연지만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어딘가 멀리 떠나보낸 피붙이들이 그리워 빛 바랜 사진 조각들을 뒤적이는 누군가를 연상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은 어쩌면 실존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그 기억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세상 어디에도 정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연지의 미학적 시도는 그러므로 정연지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정연지와 함께 이 시대를 겪어내고 있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문제와 교차한다. 격한 변화와 자극 앞에서 우리는 하루하루 우리 자신의 존재 그 자체의 위기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몽유 도원과 유리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자신의 기억을 형상화함에 있어서 작가의 이질적 미학적 실천의 경험이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연지가 채택하고 있는 미학적 방법론은 두 가지 상반된 미학적 성향이 관찰된다. 첫째는 동양화의 화면구성 방식이다. 그 방식은 단순히 배경에 놓인 산수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풍경을 바라보는 작가의 전면적인 관점으로 확장된다. 작가는 화면에 등장하는 어느 하나의 대상을 부각하지 않고 상황 전체를 포괄적으로 드러내려 한다. 정연지가 구체화하는 풍경들은 분명 자신의 일상적 삶의 반경 속에서 체화된 것이며 한 폭의 화면 속에서 전면적으로 조망되고 있다. 그러한 포괄적이고 전면적인 시각은 산수를 중심으로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 전체를 사유하는 동양화적 훈련에 의해 가능해 진 것으로 보인다.

둘째 그러한 동양화적 시각과는 상반되는 또 하나의 미학적 화면구성의 성향 또한 발견되는데, 그것은 앞에서 다룬 것처럼 연필을 통한 세밀한 형태묘사라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동양화는 수묵을 통한 선묘를 바탕으로 삼는다. 이 때 사용되는 물과 한지, 안료는 그 자체의 물성에 의해 유연하게 번지고 스며들면서 차별적인 효과를 생산한다. 그러한 동양화의 특성은 재료에 대한 전지적 지배를 통해 자신의 의도를 배타적으로 관철시키려는 서양미술과 비교할 때 일면 표현상의 한계로 작용할 수 있으나, 다른 한편 재료와 소통하면서, 자체의 물성이 갖는 특질을 극대화하는 동양화만의 차별성의 토대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동양화는 심지어 ‘진경’이라는 이름의 혁명적인 시도에 있어서조차 대상에 대한 사실적 묘사를 희생할 수밖에 없다. 이점을 감안할 때, 연필을 통한 극사실의 세부묘사는 동양화적 전면적 화면구성과는 이질적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상이한 미학적 방법을 구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쩌면, 동양화와 유리공예를 동시에 전공했던 작가의 특이한 이력 때문일 수 있다. 즉 산수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전면적 시점이 동양화적 훈련에 기초한다면, 연필을 통해 구현되는 극사실에 가까운 형태묘사는 유리라는 예민한 재료를 통제하는 공예의 경험에서 유래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 행궁동 대안공간 눈에서

이러한 상이한 미학적 성향들의 차별적인 조화는 단순한 눈요기를 만들는데 머물지 않고, 풍경에 대한 전면적인 조망 속에서 흐릿한 기억 속에서 망각되어 가는 사물들을 집요하게 추적하기에 적절한 미학적 방법론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점은 자신의 실존을 위한 감성의 토대를 구축하려는 정연지의 시도에서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정연지의 전시를 체험하면서, 인상적이었던 점 가운데 하나는 전시가 벌어지는 상황적 맥락과의 관계였다. 대안공간 눈이 위치한 수원 행동동은 주지하는 것처럼, 정조대왕의 기념비적 업적이 지역의 개발을 억제하는 공간이었다. 자랑스러운 정사(正史)의 업적이 정작 지역주민들의 삶에는 질곡으로 작용하는 모순의 현장이라는 것이다. 행궁동의 현실을 살아내는 주민들이 그 모순을 극복해 내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그들의 일상 자체에 몰입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즉 행궁동 주민들에게 그들의 일상적 삶과 그 삶에 대한 소소한 기억들은 결코 망각될 수 없는 존재의 토대라는 것이다. 대안공간 눈은 그야말로 행궁동 주민들의 일상적 삶의 공간 속에서 문화 예술을 통해 지역과 지역주민의 정체성을 확보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정교한 미학적 실천을 통해 개인의 실존의 토대를 모색하려는 정연지의 시도는 대안공간 눈이 추구해 온 과제와 오버랩되면서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