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하면서도 충만한

                                                                               이선영 | 미술평론가

백칠만 된 하얀 캔버스는 화이트 큐브나 실험실을 2차원으로 압축한 듯한 중성적 표면에 해당된다. 이 하얀 바탕에 어울리는 것은 고도로 정제된 추상적, 관념적 형태일 듯싶다. 그것은 잘 포장된 상품 같은 이미지들을 관객/소비자에게 실어 나르는 이상적인 바탕/상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음현정 전에는 이 무색, 무취, 무균의 공간에서 이끼들이 자란다. 형태도 방향성도 불확실한 그것들은 깨끗한 표면을 얼룩덜룩 오염시키는 부당한 침입자, 내지는 불순물처럼 보인다. 때로는 이런 진공 같은 생태계에서도 서식 가능한 극악스러운 생명력, 그 불가능성에 대한 경이로운 도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중성적 배경은 역설적으로 확장과 증식의 가능성을 담보한다. 거기에는 매끈한 공간 위를 활주하는 경쾌함이 잠재하는 것이다. 이끼들의 서식처인 바위나 나무 등 배경을 삭제한 이끼 형상은 단순한 자연적 풍경을 넘어선다. 이끼들은 하얀 캔버스를 그 모서리나 귀퉁이까지 종횡무진 누빈다.

음현정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주변적 존재를 정면에 자리하게 하여, 그것의 있음을 드러낸다. 자연과 가까운 그녀의 작업실은 풀, 이끼, 돌멩이 등에 주목하게 했다. 식물 분류학자 외에는 이끼를 그냥 이끼로만 본다. 그것은 익명적이다. 틈 사이에 끼어 있거나 어딘가에 붙어 있곤 하는 그것은 표면적이고 주변적이다. 심층이나 중심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보잘 것 없는 것, 쓸모없는 것에서 작가는 아름다운 형태와 색을 발견한다. 그 사랑스러움과 치유-정화 능력을 발견한다. 작가는 잘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존재에 매력을 느낀다. ‘잔잔하면서도 보슬보슬한 느낌’, ‘몽글몽글하고 따뜻한 느낌’, ‘귀엽고 사랑스러움’ 등이 이끼라는 소재를 작품으로까지 끌어들인 이끼 예찬론자의 주장이다. 작가는 빛과 수분만 있다면 어디에라도 자리를 잡는, 강인한 생명력을 겸비한 이끼들이 ‘뭇 생명력의 대변자로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외유내강의 이끼는 자기가 정착한 곳 어디라도 기점으로 삼아 표면을 확장시킨다.

그것은 생명력이자 정해진 길로 가지 않는 욕망으로 다가온다. 정해진 길이 없기에 그 욕망은 무한하다. 라깡의 심리학이 예시하듯이, 언어와 결합된 주체의 욕망은 채워질 수 있는 생물학적 욕구나 사회적 이상을 수용하는 자아의 요구와도 구별된다. 관객들은 하얀 캔버스에 녹색조로 그려진 이끼를 본다. 그러나 이끼가 놓인 자연적 문맥을 지워버림으로서 작가는 재현과 멀어진다. 이끼를 그렸다기 보다는 이끼를 닮은 그 무엇이 행해진다. 이끼와 촘촘한 붓질은 구조적 상동성을 가지는 것이다. 재현이 아닌 차이와 반복 속에 이루어지는 ‘꼬물꼬물한’ 그리기는 이끼가 가지는 자연의 치유력 및 정화력을 그리기라는 행위에 전이한다. ‘주문(呪文)을 건다’는 전시부제는 시간을 일상의 잡다함을 날려주는 이끼-그리기가 야기할 효과를 말한다. 시간은 낭비되지 않고 차곡차곡 쟁여 지지만, 그 시작과 끝은 유연하다. 깊은 뿌리, 그리고 화려한 꽃과 열매를 지향하지 않는 이끼는, 시공간 상으로 중심/주변, 전체/부분의 관계를 통합, 또는 해체한다.

이끼는 작업 뿐 아니라, 삶의 거울이 되었다. 삶-작업은 텃밭을 일구듯이 꾸준하게, 자연스럽게 행해진다. 그것은 예술인이자 생활인으로서 조각 시간을 활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반영된 것이다. 작업이냐 삶이냐 라는 극단적인 양자택일이 아니라, 산만한 일상생활에서 건질 수 있는 방향과 해법을 찾았을 때, 주변의 풀이나 이끼들이 눈에 들어온 것은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이다. 가장 큰 작품에는 중국의 시선(詩仙) 이태백이 두보 시인에게 한 ‘시를 짓느라 얼굴이 많이 상하셨습니다’는 말이 새겨져 있다. 벽 가득 벽화 같은 느낌으로 그려진(또는 쓰여진) 가로 9미터의 대작에는 칼리그래피 같은 서체가 자라난다. ‘시’ 만큼이나 크게 써진 ‘상’자는 ‘詩(작품)를 짓기 위해 노력이 지나쳐 얼굴이 많이 상하기보다는, 시자체가 되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생각이 담겨 있다. 하나의 단어가 아니라 문장으로 성립된 이 작품은 예술과 삶이 최대한 근접하기를 희망한다.

일상과 예술에서 공히 적용되는 또 하나의 단어는 ‘더’이다. 더는 양자를 규정하는 끝없는 욕망을 말한다. ‘더’는 일상과 예술, 그 중에서 어느 하나가 악역을 맡기 보다는, 물질적 삶도 정신적 삶도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는 진실을 함축한다. ‘더’와 초록 이끼의 결합은 [주문]이라는 일괄적 제목을 가진다. 전시장 입구의 작품은 이끼가 너무 덥수룩해서 더 라는 글자를 찾기 힘들 정도이다. 그것은 마치 지형도처럼 펼쳐져 있다. 또는 완성되지 못할 지도를 그리며 정처 없이 뻗어 나아가는 듯하다. 더는 초록 뿐 아니라, 갖은 색들의 회합처럼 보이는 이끼로 뒤덮인다. 초록은 물론 갈색, 황토, 회색, 노랑, 검정, 하양 등 10 여 가지 색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빨강은 초록의 느낌을 더욱 강조한다. 작품 [주문]은 캔버스 세 개가 더/더/더라는 시각적 메아리를 울려 퍼지게 한다. 글자, 소리, 색, 촉감 등이 어우러진 공감각적 작품이다.

오른쪽으로 갈수록 점차 두꺼워지며, 그 끝에는 10호 크기의 캔버스 15개를 쌓고 모서리에 더 라는 말을 쓴 작품이 놓여 있다. 이 글자는 이 모퉁이에서 미끄러지는 듯한데, 자기 앞에 쌓고 또 쌓아도 종잡을 수 없는 욕망의 실체를 드러낸다. 미끄러지는 기표사이로 욕망이 부유한다. 음현정의 작품에서 이끼는 사이와 간극에서도 번성한다. 더는 자음과 모음으로 나뉘며, 미생물처럼 원자입자처럼 헤쳐 모인다. 캔버스 가장자리에 바짝 붙은 초록 형상들은 모서리까지 자신의 영역을 확장한다. 작품 [무제]는 선명한 초록이 중심이 되어 이끼만을 커다란 원형의 형태대로 모아 놓았다. 캔버스 한가운데의 존재는 시각 관습상 초상에 해당된다. 이끼는 눈도 코도 입도 없지만, 얼굴처럼 동그랗게 모여 다정하게 관객을 바라본다. 복슬복슬한 섬유질적 표면은 기관 없이도 변화무쌍한 표정을 짓는 듯하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마치 세수한 뒤의 맹글맹글한 맨얼굴처럼, 깨끗한 맨얼굴의 인상을 느끼게 하고 싶다’고 했다. 듣고 보니 정말 맑은 얼굴로 다가온다.

적어도 이렇게 생긴 마스크 팩을 붙이면 문명의 얼굴에 쌓인 더러운 것들이 정화될 것 같다. 기둥에는 얼룩 같은 이끼 한 덩어리를 그린 작은 캔버스가 걸려있는데, 이끼의 ‘얼굴’은 점으로부터 자라난 듯하다. 그것은 더/더/더 커지면서, 급기야는 더 조차도 삼켜버린다. 그것은 갈수록, 그리고 끝내 불확실해지는 욕망의 양태를 말한다. 작은 얼룩으로부터 파생된 것들은 이끼나 글자, 또는 은유적 메시지를 재현한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그것은 생명처럼 생겨난 것이지, 기존에 있는 것을 추인한 것이 아니다. 둥근 이끼 뭉치 또는 얼굴은 마치 세포질처럼 유동한다. 원 내부에 조금씩 보이는 하얀 바탕 면은 물질의 변모에 필요한 공백을 예시한다. 이끼는 지구상 최초의 생명체로 광합성을 통해 다른 종속 생명체들을 부양했던 식물의 원초적 모습으로 다가온다. 초록 융단은 태양광선 그 자체를 에너지원으로 활용하는 식물의 역할을 지시한다.

식물의 초록은 엽록소로부터 기인한 것인데, 그것은 무기물을 유기물로 전환시키는 작용을 통해 지구상의 온 생명을 부양해왔다. 지구상에 생명이 가능하게 한 최초의 생명체로서의 식물의 위상은 나무 같은 기념비적인 존재로 상징화되곤 했지만, 이끼는 그 보다 더 밑바탕에 있으며, 나무 이후에도 가능할 삶의 모델을 예시한다. 표층을 확장하는 이끼는 같은 식물이면서도 지하-지상-천상을 이어주는 기념비적인 자연의 모델로서의 나무와 비교된다. 그것은 수직적 상승의 모델이 아니라, 측면적 성장의 모델이다. 이끼가 포함될 수 있는 뿌리 줄기적 모델은 수직의 축, ‘우주적 축’(바슐라르)이 아니라, 수평적, 표면적 확장성을 가진다. 뿌리줄기적인 이끼는 계통수로서의 위상이 아닌, 표면(또는 표면들)으로 전환된 새로운 우주의 상징인 것이다. 계통 발생학적 나무의 모델처럼 세계의 중심(옴팔로스, 세계수)이 아니라, 흩어진 중심이 있다.

그것을 추동하는 힘은 위계적이기 보다는 무정부주의적이다. 이러한 존재양태가 이끼를 소소하게도 하고 위대하게도 한다. 그것은 프랙털 도형처럼, 도마뱀 꼬리처럼, 신체 말단까지 산포된 뇌처럼, 부분 속에 전체를 내장하면서 융통성 있게 변화하는 현실에 대응한다. 그것은 5회 개인전 제목처럼, ‘모든 것은 모든 것 안에 있다’(2005년, 창 갤러리)는 것을 암시한다. 작가에게 떠오른 단어 외에 정해진 원칙 없이 우연을 필연삼아 확장해 나가는 그것들은 ‘단편들을 항상 새로운 단편화 속에 들어가게 하는 능력’(레비 스트로스)을 가진다. 레비 스트로스는 이러한 방식을 브리콜라주에서 발견 한다. 브리콜라주는 기술자나 과학자, 전문 예술가의 방식과는 거리가 있는 방식, 즉 그들만큼 자신의 전 시간을 분업화 된 노동에 투자할 수 없는 ‘아마추어’의 방식이다. 그것은 단순히 ‘프로’를 흉내 내는 2급, 3급 예술가가 아닌, 대안의 예술가를 말한다.

중년의 작가는 자신의 삶의 질서와 크게 어긋나지 않는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들에게 ‘생산하는 작업과 생산되는 것, 도구 전체와 만들어지는 것 전체는 구별할 수 없다’(레비 스트로스) 나무와 비교되는 이끼는 총체가 아닌 단편이다. 단편들이 어떤 필연적인 연결망 없이 얼기설기 엮여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불활성의 물질이 아니다. 그것들은 끝없이 재생, 생성된다. 그러나 전체의 유기적 일부로서가 아니라, 단편에서 단편이 파생된다. 최소한의 생존조건으로 삶의 굴곡 면들에 밀착하여 퍼져나가는 이끼는 단편 속에 전체를 담는다. 이끼는 액체보다 더 밀도가 있지만, 액체처럼 흘러간다. 거기에는 막힘없이 흐르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만약 어떤 장애물을 만난다면 융통성 있는 접속을 실험할 것이다. 이때 진행 방향은 예기치 못하게 바뀌지만 멈추지는 않는다. 어떤 때는 신속하게, 어떤 때는 근근이 꾸려 나간다.

음현정의 작품에서 욕망은 단어(언어)와 연관된다. 인간에게 욕망은 무엇보다도 타자로부터의 인정—마단 사럽의 라깡에 대한 해설에 의하면, 소망(wish)에 대한 프로이트의 주장과 인정(recognition)에 대한 헤겔의 사상을 결합하여, 라깡은 욕망(desire)에 대해 말했다.--이다. 또한 그것은 고갈됨 없이 끝없이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대한 작가의 욕망이기도 하다. 이 욕망은 단지 생물학적 욕구나 상상하는 자아의 요구를 넘어선, 언어적 욕망이다. 욕망은 언어처럼 원초적인 부재의 효과로 지속된다. 상징과 그 연쇄들이 욕망을 지탱한다. 상징화에는 물리적인 것과의 틈이 있다. 상징계 속에 있는 기표로서의 욕망은 ‘더’가 무한대가 되어도 충족되기 힘들다. 이러한 사실의 인정은 좌절보다는 욕망으로부터의 해방을 향한다. 미미해 보이는 이끼로부터 언어, 욕망, 뿌리줄기 등을 아우르는 시대의 키워드들을 건져 올린 음현정의 작품은 이끼같이 잔잔하면서도 충만한 삶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