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된 시간, 수정되는기억

김주희 개인전 ≪추억, 그 기억의 잔상≫
대안공간 눈 제1전시실
2014년 5월 30일 - 6월 12일

글. 조은정(미술평론가, 미술사학자) 

 

  캔버스에 발린 물감, 그 안의 이미지는 환영을 불러오고 오감을 자극한다. 그 일루전의 세계로부터 김주희는 물질로서의 화면으로 회화를 복귀시킨다. 풍경 혹은 정물화가 일루전을 벗어난 그 지점은 대상의 재현이나 모사가 아니라 실재와 조우하는 지점이다. 화면에는 제스처가 가득한데 집약된 시간, 우둘투둘한 물감의 조합 등 회화의 물질성이 넘쳐난다.

  그의 일련의 작업들은 숭례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 화상을 심하게 입은 적이 있는 작가는 숭례문 화재를 보고 ‘일종의 동지애’ 같은 것을 느꼈노라고 말한다. 상처 입은 대상과의 동일화는 트라우마의 복권이자 상처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양가성(Ambivalence)을 갖는다. 헌데 살아있는 존재가 아닌 대상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그것은 언제나 그것을 보아왔기에 가능한 것이다. 견고한 상징적 대상이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은 나약하기 짝이 없는 육체에 비견하여 심리적인 위안을 준다. 그 익숙한 존재는 역사성을 입고 더욱 견고한 실체로서 자리한다.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 수원 화성,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 뉴욕의 크라이슬러빌딩, 세종로 이순신장군동상. 모두 장소적 특성을 갖는 역사적 존재들이다. 시간으로서의 역사, 사건으로서의 역사가 물질화된 증거로서 그 자리에 그들 건축 혹은 상징물들이 있는 것이다. 그 유명한 대상들을 다양한 시점에서 바라보고 한 화면에 조합한다. 그는 이제는 오래된 법칙인 입체적 구성주의를 실현하지만 그 방식은 조화와 단일성을 희구하지 않는다. 2차원의 평면에 시간을 담은 인류 역사의 진보와 같은 이 놀라운 시각적 경험을 김주희는 파편화함으로써 생경한 것으로 환치시킨다. 늘 알고 있던 장소, 매일 쳐다보며 지나치던 건물들은 그의 파편화된 이미지들의 조합 앞에서 낯선 것으로서 생경함을 일깨운다. 그 장소, 그 사건에 대한 환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공공의 장소에 위치한 상징물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고 조합함으로써 시간성을 부여한다.

  그는 대상을 해체하고 다시금 퍼즐이나 블록처럼 꿰어 맞추어 견고한 상징물을 재건축한다. 그것은 레이어를 갖는 이미지의 중첩도, 그 순간에 존재하는 대상의 여러 각도에서의 모습도 아니다. 그것은 눈앞의 상징물이 가장 빛났던 시간,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그 순간과 현실의 교착지점이다. 그것은 이제 주변의 동시대성에서 고립된 채 존재하던 상징적 장소를 떠나 그 순간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장소에 시간을 부여함으로써 도시의 상징물들은 역사를 소환하는 ‘기억의 공간’이 되었다. 알라이다 아스만(Aleida Assmann)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그것들은 은폐기억의 장소였던 것이다. 오래된 도시의 상징물들은 망각된 사건과 화려하게 빛났던 순간들을 환기시킨다. 파기되고 버려진 과거가 기억의 통로를 통해 소환되는 것이다. 트라우마의 장소는 과거 사건의 잠재력을 유지한 채 사라지지 않을뿐더러 시간적 거리도 만들지 않는다. 작가 김주희에게 있어 민족적 자긍심의 역사적 장소였던 남대문은 화재 이후 추모의 장소가 되어버림으로써 민족적 트라우마의 장소인 동시에 개인의 트라우마를 일깨우는 대상이 되었다. 민족이나 사회적인 역사적 공간이 개인의 기억을 소환하는 통로가 되어버린 것이다.

  플라톤은 “어떤 체험을 떠올리는 것을 우리는 기억이라고 하는데, 이 체험은 마치 한 장의 그림과도 같다. 그 진행과정은 반지로 인장하는 것처럼 지각상의 인상을 남기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물론 기억의 문제가 생리학적 견고함의 문제로 믿은 결과 시간이 지나면 무너져 내릴 것을 전제로 한 것이지만 종이에 찍는 혹은 밀납으로 봉인하는 도장과 같은 기록의 방식은 기억이 각인의 방식을 통한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기도 하다. 그 각인의 도장은 명품의 로고와도 같으며 파리의 에펠탑, 베이징 자금성 또한 그런 도장이나 로고와도 다름없어 보인다.

  유명한 장소나 상징물에 대한 탐닉은 명품이 주는 안도감과도 연관된다. 널리 소비되고 인정받는 것들에 대한 선택은 현대인의 일상이자 경험이며 그 안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안정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러한 심리적 상징은 역사적 장소가 갖는 것과는 다른 층위의 문제이다. 그것은 현대인이 갖는 일상성에 기반한 익명성에의 의지를 반영하다. 다른 이들과는 구분되기 위한 욕망과 동시에 인정받음으로써 안심하는 이 양가성은 스타벅스를 좋아한 작가의 심리적 상태를 설명해준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오고 뉴욕생활을 경험한 적이 있는 작가는 “개인적으로 스타벅스를 너무 너무 좋아해서 사진을 여러 장 찍어 겹치면서 우리는 늘 보았던 이미지, 항상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이미지를 습관적으로 선택하고 있지는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러한 이미지의 반복과 중첩을 통해 수많은 브랜드에 살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고 말한다. 후기식민주의는 억압된 주체의 상황에 대해 일깨우며 분열하는 자아, 해체와 혼성으로 실체를 드러낸다. 이 중첩의 방식은 이미지가 겹치고 겹쳐서 흐려지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선명해지는 구축적인 것이다. 견고하다고 믿었던 것들에 대한 배반,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은 기억의 장소들에 대한 기억들을 환기시킨다.

  그런데 작가가 선택한 장소는 유사성을 지닌다. 베이징 자금성 앞에 걸린 모택동의 사진과 불안감을 조성시키는 생경한 색들과 현란한 네온처럼 보이는 선들은 그 철막의 광장에 드리웠던 북경의 봄을 떠올리게 한다. 신장상과 결합한 덕수궁의 문은 식민의 상황을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빛나는 달빛 아래 수원 화성은 못다 이룬 천도(遷都)의 꿈을 상징하는 것 같다. 기억의 공간은 폐허가 아닌 민족적 성지로서 견고한 미장센을 동반함 멋진 장소가 된다. 지나간 시간을 담은 공간은 기록 속의 역사적 사건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한다. 민족적이며 국가적인 사건은 장소를 통하여 개인의 기억으로 재생되며 선택적으로 강화된다. 끝나지 않을 주체의 게임에서 파편화된 이미지는 필연이며, 역사는 개인의 기억으로 신체에 투사되어 역사적 트라우마로 각인되는 것이다.

  소소한 일상과 개인의 감성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들에 대한 추구와 화사한 현실에 대한 욕망이 두드러진 세태에서 붓질이 번져나고 제스처가 드러나는 캔버스를 만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작가의 주체성을 물질화하여 응시와 주체의 문제를 역사적으로 풀어내는 이 작가에 대한 관심은 이제는 식상해진 잊혀져가기 십상인 회화의 틀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본 전시는 예술공간 봄에서 기획하였으며,
전시는 오후 12시부터 오후 7시까지 관람할 수 있으며  
월요일은 휴관입니다. 관람료는 없습니다.

문의 ; 예술공간 봄(031-244-4519)
442-180 수원시 팔달구 화서문로 76-1(북수동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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