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마음의 장소

김명아 개인전 ≪사람+사람≫
대안공간 눈 제2전시실
2014년 5월 30일 - 6월 12일

글. 조은정(미술평론가, 미술사학자) 

 

  지난 50년간 현대미술에서의 주요 키워드는 미(Beauty), 가치(Value), 원본(Original), 개념(Concept) 그리고 경험(Experience)이다. 이 다섯 가지는 무엇이 예술이며 무엇을 예술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논란 속에서 용인되는 미술의 국면을 의미하기도 한다. 원본은 차치하고라도 정작 미와 가치 그리고 개념이란 창작자나 관람자 모두의 경험에 의존한다. 경험이야말로 가장 사적인 위치에서 시작하는 절차적 지식이며 견고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해진다. 왜냐하면 ‘사물이나 사건에 노출되거나 수반됨을 통해 얻는 물건이나 사건의 관찰이나 기술의 지식’인 탓에 무한히 수정될 수 있고 체계적으로 설명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은 인간이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고 소통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일상성의 대두와 함께 소통은 현대인의 욕망이 되었다. 현대의 도시화에 따라 개인주의가 확산되고 개개인은 자기확인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김영아의 작품은 일상에서 당면하는 소통의 문제를 단편적인 시건의 기록을 넘어선 자기고백적인 상황들로 제시하고 있다. 김명아의 작업은 일상의 소소함을 넘어서 대면한 현실의 녹녹치 않음을 집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경험의 고백록이라 할 수 있겠다.

  바닥에 엎드려 머리 부분이 증폭되는 음향기 같은 삼각뿔을 뒤집어쓴 나체의 인체는 <좌절에 빠질 때>를 보여준다. 여성형 하체에 위로는 촉수 같은 형태지만 부드러운 천에 솜으로 채운 삐죽삐죽한 형태로 가득한 형태는 <자기방어>이다. 온몸이 촉수처럼 세상을 감지하는 작가의 자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성용 색이 있는 반투명 스타킹으로 형태를 잡아 역시 여성형 하체의 내부에서 위로 솟아올게 만든 형태는 <나는 누구인가>이다. 이들 몇몇 작품은 여성형의 하체를 사용하고 방어, 좌절, 그리고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처한 상황을 드러내는 페미니즘 작품에 위치시킨다.

  독자적인 형태 이외에 두 개의 형상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작품들은 이러한 개인의 내면적 고백과는 다른 사회적 소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한눈에 보아도 신부인 화사한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인물과 신랑의 검정색 턱시도를 차려입은 두 인물의 머리 부분은 삼각뿔들로 이루어져 있다. 흰색의 남자와 노란색 여자의 머리는 서로 연결될 때조차 자신의 색깔 그대로이다. 결혼과 동시에 누구나 겪는 <갈등>은 직접화법인 셈이다.

  역시 두 사람의 대화를 드러내는 작품으로 <너와 나>가 있다. 커다란 나무 박스 안에서 다리만 그러난 채 서로 투명한 여러 가닥의 선으로 이어진 이 작품에 대해 작가는 “우레탄 실로 나무박스에 가려진 두 사람을 서로 이어주었는데 이 우레탄 실은 인형극에서 배우가 인형을 조종하는 상자 같기도 하고 신경세포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무박스로 사람을 가린 것은 보는 상대방이 나무 박스 안에 숨겨진 자기 자신과 조종하고 싶은 상대방을 자유롭게 상상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고 설명하였다.

  이쯤 되면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이 작가의 경고가 들릴 법도 하다. 상대방과 소통한다는 것, 그것은 진정한 이해의 선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해 지점을 찾는 것이 아닌가 되돌아보게 된다는 말이다. 사각의 프레임 안에 종이와 우레탄 실을 이용한 <또다른 언어>는 무한히 쏟아져 나오는 테블릿 피시의 대화 혹은 SNS의 언어를 연상시킨다. 그 가상의 공간에서 우리 모두 대화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일방적인 자신의 말을 되뇌고 있을 뿐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이 의미하는 바를 충분히 읽어낼 수 있을지라도 작가 김영아의 작품 앞에서 ‘경험’이 상호 이해를 증폭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전적 지식을 내뱉는 일에 불과하다. 어찌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들을 수 없는 사람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슬로우 모션으로 30초를 흘려보내는 영화의 한 장면을 침묵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소리 없는 화면을 바라보는 사람의 일상을 이해할 수 있을까. 어디서 말해야 할지 몰라서 아무런 말을 할 수 없는 자신을 중심으로 주변이 동시에 떠들어대는 것,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니라 주변이 자신의 의견을 나누는데 혼자 다른 세계에 거처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고립(孤立)’이다.

  그래서 작가는 사람 사이의 소통 혹은 관계에 대해 더욱 깊은 관심을 표한다. 듣지 못하여 상대의 태도나 말에 반응하거나 대화에 낄 수 없는 사람은, 자신을 제외한 사람들 모두가 서로 소통하고 말로서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전달한다고 생각한다. 결핍은 상대적 위치에 완전함을 상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내민 태블릿피시에 적힌 글을 통하여 상대방의 생각이나 말을 인지하고, 소통하는 작가는 소리가 아닌 글로서 사람들의 말을 듣는다. 어떤 수사나 설명이 따르기 어려운 순간의 대화는 사실이나 정보만을 전달하기 십상이다. 말로 뿌려댈 수 있는 당장식(糖裝飾)을 순간의 글로는 나타내기 어려운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상대방의 뜻을 순도 높은 사실, 군더더기 없는 내용으로 대할 기회가 많을 것이다. 필담. 역설적이게도 언어의 틀을 통한 상징과 비유 그리고 은유의 막을 지나 장막을 드리운 언어의 함정에서 벗어나 진실의 언어를 만날 가능성이 높은 대화방식이다.

  구구절절한 수식이 사라진 자리에 담백한 사실의 나열 혹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단어화되어 있는 그의 태블릿 피시는 ‘또다른 언어’로서 언어의 본질을 드러낸다. 자신의 하고 싶은 말의 요체를 정리하여 드러내는 말들은 최소한의 전달을 의미한다. 헌데 그것은 상대방이 이해하거나 아니거나를 개의치 않는 일방적인 것이며 통보이다. 소리가 보조적인 소통수단이 되고 글이 일차적 소통이 되는 그의 경험은 언제나 이해할 것 혹은 무엇인가를 해주기를 바라는 요구를 담고 작동한다. 그 반복되는 결정의 과정에서 상대방이 내 방식대로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욕망은 그래서 당연하다. 이 욕망은 작가가 듣지 못해서 생긴 특별한 현상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피그말리온에서부터 자동인형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욕망하는 존재에 대한 완전한 조정은 인간의 보편적 정서의 일부이다. 그리하여 김영아의 고독한 소통의 욕망 앞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과 조우하게 된다. 그것은 누구나 욕망하는 것이며 누구나 완전함에 이르지 못한 미지의 장소이다.

본 전시는 예술공간 봄에서 기획하였으며,
전시는 오후 12시부터 오후 7시까지 관람할 수 있으며  
월요일은 휴관입니다. 관람료는 없습니다.

문의 ; 예술공간 봄(031-244-4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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